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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이봉하 고문을 생각하며

이봉하 고문을 생각하며

 

윤제철

 

1.들어가는 글

 

  한 생애를 알차게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에 먹은 일인들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흔히 일 년 농사일에 비추어 잘 지었느니 못 지었느니 평가를 하기 도 한다. 어쨌든 한 생에 한 번을 짓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고희란 예로부터 드물다는 뜻으로, 사람의 나이 일흔 살 또는 일흔 살이 되는 때를 이르는 말이었기에, 사실상 생업으로 여기던 일들은 정년을 하든가 은퇴를 하면 여생이라 하여 죽을 때까지 남은 생애는 당연히 쉬었다 가는 십년 전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의학의 발달과 영양섭취 및 식생활개선 등으로 인간수명이 늘었다. 큰 사고가 아니고서는 보통 팔십을 넘기는 상황에 와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비해 여생이 너무 길어진 것이다. 아무리 늦어도 나이 육십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업을 마치면 이십여 년 이란 긴 시간을 놀아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하면서 노느냐에 골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노인복지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 중에 종합복지관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활용하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는 등록기간이 되면 경쟁을 치르는 지역도 생겨나고 있다. 여생을 즐기는데 앞장을 서셨던 이봉하 고문의 모습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2,이봉하 고문을 생각하며

 

  20091월에 당시 강의를 맡았던 필자는관악문화원 문학반에서 뵙게 된 여러 회원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으셨던 이봉하 고문을 기억한다. 고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 문화원에 고문 신분이셨던 까닭이다. 팔십 중반의 고령이셨지만 키 크고 날씬하신 데다 자세도 꼿꼿하셨다. 맨 앞에 앉으셔서 열심히 들으시며 메모하셨고 산문이나 운문을 써오셔서 품평을 받기도 하셨다. 그 모습을 보며 힘드실 텐데 잘 견디시는구나 생각했지만 사실은 배우시겠다는 열의에 달려있었다.

  필자가 강의 자료를 프린트하여 강의실로 들어서면 맨 앞에 앉아계시던 고문님은 일어나시면서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셨던 것이다. 자식 벌 밖에 안 되는 강사에게 너무 과하다는 생각에고문님, 저에게 인사를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사양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답하시는 말씀에배우는 사람이 스승 앞에 인사를 안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하시는 바람에 한 말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모든 회원들께 모범이셨던 분이었다.

  더구나 1926년에 태어나신 *이봉하 고문님은 1958년부터 1961년 창원시 진해구 웅동 지서장으로 재직하면서 경로당을 건립하고 소사마을의 다리를 가설하는 한 편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하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고 이후에 진해경찰서 수사과장을 역임하시고 창녕 경찰서장을 거쳐 해양경찰대에서 정년퇴직하신 분이셨다.

  지금도 웅동 1동 동사무소 잎에는하루하루 새로운 일들을 행하다 보면 나날이 또한 새로운 일들이 생기듯 새로이 한 조각 비석을 세우니 그 모습은 마치 새로운 봄을 여는 듯하다고 새겨진 행적기념비가 서있다.

  퇴임 후에도 쉬지 않으시고 사진작가로 활동하셨다. 그야말로 인생 2모작에 성공하셨던 것이다. 1998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장을 맡으셨을 때문예진흥원의 구조조정이 현실화될 경우 예총의 존립이 위협을 받게 되면 예총 산하의 한국사진작가협회도 존폐위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회원들의 권익을 위해 주장하셨다.

  그리고 이제 3모작의 길로 시창작을 택하신 것이다. 사진을 찍어 표현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정하는 일이 중요한 것처럼 시의 창작에서 매체를 선택하여 관찰하고 은유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것과 흡사하다고 하셨다. 또한 사진의 제목을 정할 때 표현된 대상을 직역하듯 쓰지 말고 의역을 해야 하는데 시창작을 하고나서 시 제목 붙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감각이 열려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남보다 빠른 편이셨다.

  2011년 시전문 계간지시세계봄 호에그림자,이메일,단풍,까치와 버드나무,늙는다는 것이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시인으로 데뷔를 하셨다. 당선소감을 통해 나의 시가 등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한 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뷰엌 아궁이에 청솔(靑松)이 훨훨 타는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한참을 무아지경(無我地境)을 걸어야만 했다. 평소 시를 써오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시가 좋아서, 치매 예방을 하면서, 젊은 문인들과 어울리면서 우정을 다지고 시회(詩會)가 끝나면 한 잔의 막걸리 맛, 그것이 바로 시가 아닌가?

  나 자신을 보고 늙은 핑계 하지 말고 시작을 계속 하여라 다잡고 있다. 남아 있는 힘으로 문학의 산을 계속오르련다. 등단 뒤에 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슬기롭게 천천히 걸어가리라. 세월은 아름다운 시를 싣고 붉게 불타는 끝없는 바다를 향해 계속 흘러가면서 시를 띄우리라말씀하셨다.

 

3.나오는 글

 

  강의를 하는 입장이면서 인생의 깊은 체험의 언행을 보면서 많이 배운 스승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하다한들 멀리 있어 평범함을 보지 않아 존경한다지만 고문님은 가까이 계셔 보여주심으로 존경심이 우러나게 하셨던 분이셨다.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어르신을 기리는 추모의 글을 부탁을 받고 무슨 말씀을 올려야할지 망설이다가 두서없이 꺼낸 이야기가 누가되지는 않을는지 못내 어설프기만 하다. 지금도 곁에 계시는 것 같아 마음가짐을 곧추세우고 있다.

  직장을 퇴임하자마자 시창작 강의를 창설하여 맡으면서 수강생들을 대할 때마다 어느 곳에서든 정성을 다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사람들 각자가 만들어낸 창작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닌 도와드린다는 원칙을 고수하려 한다.

  고문님의 등단 작품 중에긴 세월 내 곁에 벗이 되어준 또 하나의 나/ 많은 시간들 귀찮도록 나를 지켜보며 따라다녔지/ 너는 비록 내게 말로도 행동으로도/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지만/ 나를 대하는 너의 모습 속엔/ 따듯함과 서늘함이 있었지/ 정답게 속삭이는 또 하나의 나로 그림자를 표현하신 것처럼 그렇게 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