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바위와 허준
윤제철( 시인, 서울초중등문학교육연구회 회장 )
1.허가바위
강서구 가양동 산 1-2번지에 있는 허가바위(공암바위) 는 서울시 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있다. 남향은 동굴의 몸체가 되는 탑산이 누르고 있고 북향은 영등포공업고등학교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탑산에는 오래 전부터 탑이 있었다고 하나 육이오 사변이후 없어졌다고 한다. 탑산은 작은 동산에 불과하지만 봄에는 진달래꽃이 탐스럽게 피어 그윽한 향을 뿜어내고 가을이 되면 알록달록한 단풍이 어우러져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탑산 아래 절벽으로 된 밑에 동굴이 뚫려 있어 공암(孔巖)바위 라고도 한다.
이곳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직장인 영등포공업고등학교가 1995년도에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부터였다. 출퇴근 시간이나 근무를 하면서도 창밖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허준은 드라마를 통해서 의원으로서 명성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환자에 대한 정성이 남달라 늘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양천(陽川) 허씨(許氏)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 바로 허가(許哥)바위라고 할 수 있다. 허선문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중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러 한강에 도착하였으나 건널 배가 없어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주민들과 함께 기꺼이 배와 군량미를 추렴하여 승전을 기원하였다. 그 뒤에 전쟁에 이긴 왕건은 허선문에게 삼한 공신 양천촌주로 봉하였다.
구암(龜岩)공원은 한강과 접해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 88대로 건설 시에 막아 연못이 되었고 공원 이름은 양천 허씨의 후손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 허준(許浚)의 호를 인용하여 붙인 것이다. 연못은 어찌 보면 나루터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88도로 밑에 터널을 뚫어 한강과 연결하여 옛 모습을 구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원 북쪽에는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는 허준의 동상이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으로 앉아있다.
2.허준
허준은 1546년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였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여 명성이 높았다.
그의 나이 29세로 늦은 나이에 궁중의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으나 내의원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어의로 선임되어 임금의 병을 진찰하고 효험이 있자 임금으로부터 신망을 얻게 되었다.. 1590년에는 허준이 왕자를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의 가자(加資)를 받았으나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가 신하들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쳤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동궁인 광해군의 병을 고친 공로로 허준은 가자되고 이에 허준은 그 벼슬이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같은 해에 선조가 허준에게 완비된 우리나라 의서를 찬집하라고 일렀다. 허준이 편국을 설치하고 책의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 수의 양예수(정2품)가 사망함에 따라 허준이 수의가 되었다. 1604년 임금이 호성공신(扈聖功臣)의 교서를 발급하여 의관으로서는 허준과 이연록(李延祿) 두 사람을 3등에 책훈하고 허준은 양평군(陽平君)에 봉작되었다.
1606년에는 임금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양평군 정1품 보국숭록 대부로 승급했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결국 허준의 가자를 보류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잘 낫지 않았는데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허준을 벌주는 일로 논의가 복잡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고 막아섰다. 1608년에 마침내 선조의 병세가 급박하다가 돌연히 사망했다.
허준을 보호하던 광해군도 견디지 못하여 허준의 거처를 제한하는 벌을 내리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허준에게 내린 벌을 해제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허준은 〈동의보감 東醫寶鑑〉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 마침내 완성했다. 이후 어의로 있다가 1615년 죽었다. 그의 사후 광해군은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승록대부를 추증했다.
3.건강한 생활
「옛날 뛰어난 의원은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미리 병이 나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의원은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줄 모른다. 이것은 근본을 버리고 끝을 쫓으며 원천을 캐지 않고 지류만 찾는 것이니 병 낫기를 구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가」라는 현판은 동의보감의 한 구절을 서예가 장성연님의 글씨로 쓰여졌다.
허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탑산 허가바위 주변에 허준박물관을 비롯해 대한한의사협회 건물이 들어서게 되어 명실상부한 한의학의 메카로 떠올랐다. 해마다 구청에서 주최하는 허준축제는 그분의 위업을 되새겨주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우체국을 거래하는 필자는 구암공원을 지나치면 허준동상과 연못의 광주바위를 못 본척할 수가 없다.
아무리 오래 살면 무엇 하나?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늘 관심을 갖고 몸을 보살펴야 한다. 늘 몸에 이상이 생겼을 대 큰 힘이 되어주는 의원을 찾아 점검해야 한다. 수명이 점차 높아가고 있는 현실이지만 제몫을 다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어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갖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필수 요건이 되고 있다. 미리 질병으로부터 예방을 하고 걸리지 않도록 준비가 필요하다.
오늘도 허가바위를 지나치며 그 분의 숨결을 느꼈다. 그리고 같은 직장에서 맑은 영혼을 추구하는 세목문학회 회원들의 시화전시회를 열기로 박물관장님의 승낙을 받고 학교 정문을 들어섰다. 나루터의 한 부분이었던 동굴은 물길이 끊어진 지하실 통로처럼 변모된 모습이 안타깝기 만하다. 동굴이 점차 그 넓이가 밖으로부터 허무러져 좁아져가고 있다는데 보다더 관심을 갖고 관리에 절처를 기해야겠다는 바램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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