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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미당 서정주의 집

미당 서정주의 집


명작을 남긴 산실로 오래도록 보존해야 할 사명

                                                                            편 집 부

1. 찾아가는 길


 월드컵 축구경기장이 있는 상암동 주변 난지공원에서 시행한 교내 백일장대회를 마치고 「미당 서정주의 집」을 방문하기 위하여 서둘러 6호선 전철을 탔다. 삼각지역에서 사당역까지 4호선을 갈아타야했다. 사당역 6번 출구로 나가서 8분 정도 똑바로 걸어 올라가니 육교를 지나 「예술인 마을」정류장이 보였다. 그 곳에서 가던 방향으로 조금 가다가 바로 좌측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이정표가 보였다. 50m쯤 내려가면 우측으로 200미터 들어가도록 이정표가 다시 보인다. 다시 삼거리 길에서 좌측으로 120미터 가도록 이정표가 보인다. 가다가 사당초등학교 서쪽 울타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조금 더 가면 도로 우측에 미당 서정주의 집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새로 정해진 길안내 겸 주소가 남부순환로 256 나길 4였다.


2. 주택 전경


 꽃 피는 계절 4월 15일 셋째 주 금요일이다. 백목련과 개나리가 만개한지 며칠 지난 봄이었다. 미당 선생님이 31년이나 사시던 주택이며 생전에 필자가「사랑방 시낭송회」에 모시고 행사를 진행한 일이 있어서 모시려던 과정의 어려움이 추억으로 떠올랐다. 말끔하게 바깥 울타리부터 주택 내외부는 수리가 되어있었다.

 문이 열려있었는데 들어서기 전에 우측에 붙여진「서정주」선생의 문패가 또렷하다. 좌측에는 오래된 주소가 붙어 있는데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사당동 四九三 번지 예술인 마을 A 五百十五 라고 쓰여 있다. 관람시간은 아침 9시에서 저녁 6시까지 인데 매주 월요일과 신정휴일, 설날 및 추석연휴에는 휴관을 알리는 표시가 보였다.

 문으로 들어서니 죄측에 봉산산방에 대한 설명이 되어있는 석판이 서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시선이 마주하는 관리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요원과 신미정 관장이 분주하게 일하는 곳이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거실에 들어서니 안내가 시작되었다.


3. 일층과 이층, 시집과 유물


 일층은 부엌과 화장실, 방1(관리실)과 방2(만년에 주로 기거하시던 곳), 그리고 거실이 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 직접 도면을 약식으로 그려 설계한 도면이 트레이싱지에  담겨 있고 필요한 예산이 적힌 견적서가 함께 줄을 서 거실 벽에 붙어 있다. 방2에는 지팡이와 모자, 그리고 넥타이를 비롯해 즐겨 입던 한복, 실내 및 외출복들이 걸려있었다. 아담하게 꾸며진 정원이 앞마당에 있고 더 안으로 들어가 동편에 시인들이 모여 휴식과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넓지는 않으나 쓸모 있게 꾸며졌다.

 이층은 방3(창작의 산실)과 화장실, 방4(영상실)과 거실이 있다. 거실로 들어서면 방 앞에 조각가 박재소 님이 만든 미당 선생의 흉상이 바라보고 있어 방문객들을 일일이 맞아주는 듯했다. 창작실에는 발간한 시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생전에 세계여행을 두 번 다녀오시면서 세계방랑기를 내셨다. 그 영향으로 세계 각국에 많은 미당의 시세계를 알릴 수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셨던 때를 제외 하고는 그 곳에서 창작활동을 하셨던 곳이었다. 그리고 늘 몸에 지니셨던 담배파이프, 라이터, 안경, 돋보기, 부부여권 등이 눈에 띄었다. 영상실에는 미당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물이 화면과 육성으로 들려준다. 벽면에는 문학사에 남을 위대한 시 정신에 대한 가득한 내용과「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는 시가 걸려 시인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4. 강의와 작은 시낭송


 주택의 동편으로 바닥을 판재로 만든 마루처럼 갖추어 네 사람이 앉을 만한 긴 의자가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앞으로 지향하는 관계당국의 방침은 작은 시낭송회, 강의, 세미나 등 시인들의 행사를 신청을 받아 추진해 갈 것이라 했다. 날씨가 너무 덥거나, 추운 날을 제외하고서는 매달 한 번의 강의를 문화원 문학아카데미회원들이 찾아 주였으면 하는 입장이었고 그 시간에 찾아온 학생이나 일반 방문객들도 함께 참여를 희망하는 분들의 참관을 허용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처음 개관을 축하하는 발길이 이어졌으나 점차 숫자가 예상 보다 적어 구체적인 계획과 추진이 절실한 상황에서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는데 많은 협조를 요청하였다. 아직도 미당 선생의 친일에 관한 발언이 인테넷을 통한 부정적인 측면의 주장을 펴고 있어 한국시의 역사를 걱정하게 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제 시작하는 사업이 서둔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우나 작은 힘 하나하나가 모여서 커다란 힘을 만든다고 여겨져 필자 주변의 시인들과 함께 찾아오는 발길로 천리 길의 출발로 삼하고자 하는 것이다.  


5. 미당 서정주의 생애

     

 1915년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한 미당 서정주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6년 동국대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36년에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시인부락」을 창간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말기에 시와 글을 통해 친일 행위를 하였는데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해여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라는 고백을 한 바 있다.

 해방 후에는 당시 문학계를 풍미하던 좌파 계열의 문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이른바 순수 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다수의 문학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줄곧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문학적 명성과는 별도로 그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고택이 남아 있어 서울시에서 구입하여 관악구청에서 보수하여 사후 10년 만에「미당 서정주의 집」이 복원 되면서 유품 중 일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보간 중인 유품들 가운데 60여점을 기증을 받아 전시하게 되었다.


6. 미당 서정주의 시세계


 1933년부터「동아일보」와「학등」에 3~4편의 시를 발표한 뒤, 1935년「신건설」에 「자화상〉을 발표하고, 1936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벽」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였다. 1936년 시전문 동인지「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여기에「화사(花蛇)」,「달밤」,「방(房)」등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43년 친일 성향의 출판사인「인문사」에서 발행한 잡지「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보며 시와 종군기 등을 썼다. 이때의 친일 이미지는 1980년 전두환 군사정부를 찬양한 일과 함께 그에게는 씻을 수 없은 과오가 되었다. 소설「최체부(崔遞夫)의 군속지망(軍屬志望」(조광, 1943. 9)을 비롯한 소설 2편과 많은 평론이 있지만, 20권이 넘는 시집을 포함한 시선집이 있으나 창작 주류는 시였으며, 시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시세계는 첫 번째 단계는 첫 시집「화사집(花蛇集)」(1941)에서부터 2번째 시집「귀촉도(歸蜀途)」(1948) 이전까지의 시기로, 정열적이고 관능적인 생명의식이 그 특징을 이룬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자화상」은 삶의 내면적 방황과 좌절, 그리고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는 의식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단계는 2번째 시집에서 시선집「서정주시선」(1956) 이전까지의 시기로, 동양적인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노래하게 된 과정이 이 시기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시는「국화 옆에서」(1947) 등이 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에서 보여주는 격정과 관능, 절망과 분열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안식처로서의 '꽃'과 '누님'은 곧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는 과정이다.「귀촉도(歸蜀途)」(1948)·등에서와 같이 한국적 정서를 탐색하고 있다. 이러한 생명의 발견과 달관, 동양적인 정관의 입장은 화해를 바탕으로 하며, 여기서의 화해는 사회현실과의 치열한 대결 끝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인 갈등과 회의를 거쳐 얻어진 것이다.

 3번째 단계는 시집「신라초」(新羅抄)〉(1961)와「동천(冬天)」(1969)이 나온 시기로, 신라의 정신과 새로운 동양사상의 탐구가 중심이 된다. 앞 시기에 얻어진 화해의 마음은 심화되어 전래의 샤머니즘뿐만 아니라, 노장사상이나 유교까지 받아들이고 있으며 특히 불교의 윤회사상과 인연설에 열중하고 있다. 시집「신라초」(新羅抄)」는「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통해 얻은 '신라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신라를 하나의 역사적 공간이 아니라 화해에 의해 인간과 자연, 신화가 융합된 초월적 세계로 보았다. 시집「동천(冬天)」에서는「신라초」에서 얻은 동양적 정신을 좀 더 심화시켜 고전적인 절제의 경지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지칠 줄 모르고 구도자의 행로를 걸어온 시인의 자신감과 원숙의 경지를 입증해주는 한편, 사회와 역사와 멀어진 개인적 구도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세계로의 도피, 형이상학으로의 도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여섯 번째 시집「질마재 신화」(1975) 에서는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사람들과 풍속을 산문 양식에 담아내 동양적 정신을 확대하여 '고향'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로도 정력적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해「떠돌이의 시」(1976)·「산시」(1991)·「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의 시집을 냈다. 1983년과 1991년 2번에 걸쳐 민음사에서「미당 서정주 시전집」을 펴냈다. 그밖에 평론집으로「시창작교실」(1956)·「시문학 개론」(1959)·「한국의 현대시」(1969)·「시문학 원론」(1983) 등을 펴냈다.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타계 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7. 미당 서정주의 시


<벽(壁)>

덧없이 바라보던 벽에 지치어
불과 시계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정지한 '나'의
'나'의 설움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 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벽아.


<
귀촉도(歸蜀途)>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ㅅ걸, �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는 이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가락 눈이 감겨서
제피에 취한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햇 동안 나를 키운 것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국화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닢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네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었나보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동천(冬天)>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8. 「미당 서정주의 집」의 의미


 미당 서정주는 당시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으로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맞아 10대 시인을 선정되었다. 한국 현대시 100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인은 김소월과 서정주를 손꼽았다. 서정주는 그의 대표작「동천」,「자화상」,「국화 옆에서」등에서 민족 언어를 완성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정주 시인은 문단에서는 문인들에게 찬사와 비난을 받고 있다. 지난 교육과정 개정 때 미당의 시는 중, 고교 국어교과서에서 사라졌지만 문학교과서에서는 아직도 남아있어「신부」는 시험문제로 출제되고 있다

 미당 서정주를 친일행위로 비난을 하고 있으나 어느 원로시인은「미당의 작품은 그의 친일 과는 구별해서 논의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친일이나 월북이나 시인의 행위에 대한 구분을 지어 부를 수는 있지만 우리말을 풍부하고 아름다운 시어로 만들어낸 서정주의 문학적 성과에 대한 업적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서울시에서 미당 서정주의 집을 구입하여 관악구청에서 운영 및 관리에 열성을 쏟는 일은 조금도 어색한 일이 아니며 명작을 남긴 산실로 오래도록 보존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문학의 향이 깃든 시집들이나 삶의 흔적이 담긴 유물들이 앞으로 발전해나가는 우리 시문학의 튼튼한 주춧돌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참고자료

인터넷 다음「백과사전」에서 서정주, 서정주의 시세계

「미당 서정주의 집」홈페이지  


- 위 글은 시세계 2011년 여름호에 게재된 기획특집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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