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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시인은 창작정신의 소유자

시인은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이겨낸 창작정신의 소유자


윤제철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운동이 학원가에서 열풍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본래는 미래의 지도자를 키워내자는 의도에서 자기가 주인이 되는 생활을 이루자는 것이었는데 학습에다가 맞춤한 형태로 변환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위하여 눈치나 보며 나를 감추었던 사람들이 모든 생활에서 주인이 되고자하는 열망은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여태까지 학습을 해온 학생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부모들의 지시에 따라서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학원 등을 시간표에 의하여 기계처럼 움직여야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강요로 질 들여진 형태의 성적표를 얻어 일류대학교를 진학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한 노력이 아니라 부모가 거는 기대를 감당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대체로 부모가 바라는 대학을 진학하면 그 다음의 목표는 없어진다.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학력이 상위권에 놓여있던 우리나라가 대학에만 들어가면 하위권으로 밀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목표 다음에 목표가 이어져나가는 선진국의 상황과 매우 다른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선택한 전공이 마음에 차지 않거나 적성이 맞지 않아 전혀 다른 쪽의 직업을 얻기 위한 시험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자신이 무엇에 흥미를 갖고 있고 무엇을 잘하는지를 무시하고 합격해야 한다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남들보다 잘하고 있는지를 학교 선생님들이 보고 판단하여 진로를 결정해준다는 외국과는 너무 커다란 차이가 있다. 학생들 각자의 생각을 존중하여 주인이 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어야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우리에겐 없다.

 시를 쓰는 시인의 경우도 시 속에서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음에 드는 시인의 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답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시는 흉내를 내거나 남이 쓸 때 따라서 쓰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앞에 전개되고 있는 사물과 사건을 관찰해야한다. 벌어지고 있는 일과 내가 하고자하는 말이 비유가 일치되어 맞아 떨어지는 경우엔 반듯이 시상을 메모해야 한다.

 시인 자신이 먼저 생활의 주인이 되는 생활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도 시인자신이 주인의식을 갖지 않으면 찾아 볼 수 없다. 시를 쓴다 하더라도 언행이 일치가 되지 않는다면 공감을 얻는데 실패할 것이다.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판단하는 기준도 보는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시 속에 화자의 사고방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인이라는데 시 한편 읽어보기가 가뭄에 콩 나듯 어렵다면 이미 시인이 아니다. 남의 눈치나 보고 할 말을 못하고 지내는 생활의 주변 시인이라면 시를 쓸 만한 소재가 쉽게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당하게 해야 할 말을 다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선구자적인 입장에 서있어 내 생활의 주인역할을 다하는 시인이라면 소재가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것이다.

 시는 능동적인 사고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다. 수동적인 사고에서는 좀처럼 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움직여야 비로소 그 흔적에 따른 감각을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이제까지 학습활동이나 생활환경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이겨낸 사람들만이 행할 수 있는 창작정신의 소유자이다.  

 

  - 시세계 09년 여름 호 권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