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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산첵-수필

사랑이 아파요 - 장석영

                                                                       사랑이 아파요

 

                                                                                                                                                   장석영(수필가, 문학평론가)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오후, 일과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면서 잠시 교실에 들렀다. 의례적으로 문단속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교실에 누군가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학생 곁으로 가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본래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보아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 참 만에 고개를 든 그를 데리고 학교 앞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도 그는 우울한 모습으로 말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한 잔 마시면서 나는 무슨 일 있니?” 하고 물으니 그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찻잔에 남아있던 물기가 마를 즈음 그가 한 마디 했다. “선생님, 아파요.” 나는 그가 어디가 아픈지 말은 안했지만 금세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간의 일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좋아하던 남학생이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을 피한다고 했다. 그렇게 자주 전해주던 문자도 눈에 띄게 줄었고 만나자고 연락해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때 그를 향했던 좋은 감정은 세상 모든 것을 잃더라도 오직 한 사람으로 채워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다 해도 한 사람을 잃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허망한 삶이 될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어린 가슴에 이렇게 깊은 사랑의 못[池塘]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우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릴 적 나는 시골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살았다. 어느 해 식목일, 나는 감나무 묘목 한 수를 집 빈터에 심었다. 감나무는 튼실하게 자라서 묘목을 심은 지 4  년째 되던 해 감 세 개가 열렸다. 가을빛에 빨갛게 익어가는 감을 볼 때면 내 마음은 오묘한 자연의 기운과 합일되고 철학자의 고뇌 속에 반짝이는 철리를 이해하듯 사색에 잠겨 꿈을 꾸곤 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찬장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엄마도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몹시 배가 고픈 상태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감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잘 익은 감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았는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진정眞情을 무시하고 주린 배부터 채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감나무는 예전과 다름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볼웃음으로 반겨주던 단과丹果는 더 이상 그 곳에 있지 않았다. 순간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선택했던 소유사랑은 아름답고 소중했던 존재사랑을 잃게 하였던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은 시간이 흐르면서 절대로 어느 한 쪽 것이 될 수 없음을 안다.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되었던 우리는 영원히 하나라는 사랑 공식도 점차 소원해지고 사랑 감정 또한 시들해 짐을 알 수 있다. 사랑이 냉정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간의 감정이 얼마나 어이없고 허무했던가를 깨닫게 된다. 내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어느 날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상 속에서 보냈는가에 대한 자괴감마저 들것이다. 결국 사랑은 내가 누군가에게 소유되고, 누군가를 내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흐르는 물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과 교감을 이루되, 어느 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한 번 맺은 연을 소중하게 여겨 오래도록 이어가는 동반자적 관계처럼 사랑은 존재하는 것이다.

  영업 종료 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식당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로부터 전자우편 한 통을 받았다. 메일 속에는 거미와 이슬의 사랑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깊은 숲 속에 거미 한마리가 살고 있었다. 거미는 오랫동안 친구가 없어서 외롭게 지냈다. 어느 날 아침, 거미가 잠에서 깨어 거미줄을 보니 물방울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거미가 물방울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이슬이라고 대답했다. 거미는 이슬에게 서로 좋은 친구가 되자고 했다. 이슬은 잠시 생각하다가 좋아!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나를 절대로 만지면 안 돼!’하고 말했다. 거미는 이슬이 한 얘기를 지키겠다며 다짐하고 좋은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세월이 흘러 거미는 이슬이 없는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거미는 이슬을 만지고 싶었다. 거미는 이슬에게 , 너를 만져보고 싶은데.’ 하고 말하자 이슬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 나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럼 나에게 한 가지 약속해,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거미는 말했다. ’!‘ 거미가 두 손으로 이슬을 꼭 껴안는 순간, 이슬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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