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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산첵-수필

새 달력을 걸며 - 최병영

새 달력을 걸며

 

 

                                                                                                                                          최 병 영(수필가, 문학평론가)

 

 

  새 달력을 건다. 한 해가 부식되어 스러지고 또 다른 한 해가 찬연히 솟구친다. 보신각 종소리가 누리에 파문으로 번지자 벽면에서 낯익으면서도 생경한 숫자들이 젖은 날개를 편다. 금세 부화한 아라비아 숫자의 행렬이 꼿꼿이 등줄기를 곧추세운다. 달력에서 비릿하고 짭조름한 소금 내가 풍겨온다. 등 푸른 숫자마다에서 먼 바다의 거친 파랑이 물결친다. 바다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이리라. 태양은 천체가 그어놓은 시간의 구획을 따라 빛살문양을 조각하다 먼 바다에서 그렇게 수몰되고, 또 그렇게 돋아났다.

  숫자는 맹렬한 불꽃이었다. 숫자는 화염처럼 한순간에 치열히 피어올라 하루를 온전히 사르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숫자에서 결코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숫자는 스쳐가는 바람의 행렬이었다. 숫자는 벽면에 착상되어 존재하다 순식간에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세월의 잔상(殘像)이었다. 건장하고 싱싱하던 열두 장이 서서히 남루해지며 낱장으로 뜯겨나갈수록 등허리에 얹힌 짐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내 아비가 끙끙대며 짊어졌던 짐이었다. 내 아비의 아비가 끙끙대며 짊어졌던 짐이었다. 숫자는 힘겹고 험난한 질곡의 역사를 천형(天刑)처럼 짊어졌다. 숫자는 바람결에 닳아 퇴화하면서 점점 난삽한 품성으로 변질돼갔다. 올해도 달력은 그런 숫자를 버겁게 품어 안고 오늘이 산란하는 질퍽한 삶의 늪을 모질게 헤쳐 나갈 것이다.

 묵은 달력을 떼고 새 달력을 거는 건 상서로운 일이다. 묵은 달력과 새 달력 사이의 틈바귀가 벌어지고 숫자를 에워싼 동그라미마다에서 푸석푸석 먼지가 인다. 조밀하게 기록한 갖가지 메모들이 지난해의 다양한 일상을 양각하며 의미 있는 깃발로 펄럭인다. 무심히 돌아서는 한 해가 가뭇하고 새로이 다가서는 한 해가 자욱하다. 달력에 빼곡히 박힌 퇴락한 회한의 언어가 이음새에서 삐걱대고 부식된 잿빛 애증이 서릿발로 날을 세운다. 숫자는 단절된 행적의 울음이었다. 숫자는 조락(凋落)한 생의 비명이었다. 숫자는 빙의(憑依)된 삶의 아우성이었다. 숫자는 절름거리는 일상의 소용돌이였다.

  새 달력의 갈피를 열고 붉고 푸른 숫자 두어 개를 챙긴다. 챙긴 숫자를 앞섶에 깊숙이 품어 안고 바람 따라 길을 나선다. 바람은 결코 길을 묻지 않는다. 그러기에 방향도 속도도 예측할 수 없다. 종종걸음으로 바삐 바람의 길을 따라가며 주위에 널브러진 단상(斷想)들을 줍는다. 동화로 아름답게 채색한 유년기의 꿈을 줍는다. 융합보다 독단이 심했던 사춘기의 고뇌를 줍는다. 사유보다 실행이 절실했던 성년기의 갈등을 줍는다. 그리고 일출보다 일몰이 더 절절한 오늘의 회한을 줍는다. 그것들이 정연히 한 폭의 수묵화로 채색된다. 색채의 밀도가 묽은 화판(畵板) 위로 한 줄기 바람이 스쳐간다. 떫고 비린 바람소리가 긴 파장으로 물결치며 성찰로 흔들린다. 달력 모롱이에서 몇 장의 깃발이 된바람을 타고 펄럭인다.

  이제, 새 달력에는 좀 더 하얀 여백을 담아야겠다. 해마다 게 알 품듯 조밀히 새겨 넣던 동그라미와 조악한 메모를 비우고 숫자의 혈관을 순백의 여백으로 채워야겠다. 고고(孤高)한 백자와 동양화처럼 정결한 공간이 지니는 여백의 미를 창출해야겠다. 순백의 미를 극대화하여 채움에 대한 집착적 미련을 제어해야겠다. 그리하여 동그라미와 자잘한 메모가 없이 담백한 달력을 통하여 느긋이 주위를 돌아보아야겠다. 여백은 안락이고 여유이고 휴지(休止)이며 역설적인 적극 실행의지의 표방이다. 넉넉히 여백을 창출한 후에 찬찬히, 아주 찬찬히 달력에 박힌 숫자의 의미를 음미해야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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