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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산첵-수필

모과 - 이경엽

                                                                              모과

 

                                                                                                                                                      이경엽(수필가)

 

 

  가끔은 격 없이 주고받는 외설적인 농담에 박장대소가 터져 나오는 걸 보면 나이가 조금 들긴 들었나보다. 누군가 사람을 나이대별로 구분하여 남자는 불, 여자는 과일에 비유를 하였다. 어찌 그리 절묘한지 들을 때마다 포복절도 하고 만다.

  나이 육십 대를 남자는 반딧불, 여자는 모과라고 하였다. 이유인 즉 반딧불은 불인가 싶어 잡으면 꺼지기 때문이고, 모과는 먹지도 못하는 것이 냄새만 풍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정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농담이다. 그러나 한참 웃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금은 서글퍼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달력이 또 한 장 찢겨 나갔다. 달랑 두 장만 남아 사고무친 남매처럼 문풍지를 비집고 들어오는 된바람에 파르르 떤다. 갈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바야흐로 조락의 계절이다.

 며칠 전 일이 있어 경비실에 잠시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모과향이 그윽하다. 둘러보니 창가에 모과 대여섯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화단에 탐스럽게 매달려 있던 것을 따다가 진열해놓은 모양이다.

  모과 특유의 향긋한 냄새는 무어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모과 향은 후각을 짙게 자극을 하면서도 마음을 상쾌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자연 향으로는 아마 으뜸이 아닐까 싶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코에 대니 금방이라도 향기에 취할 듯하다. 문득 나이 육십 대는 모과라는 비유를 떠올리니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나이 육십이 되면 과연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긴 할까?” 하고 약간 비틀어 생각을 해보았다. 암만 생각을 해봐도 고개가 저어진다.

  다른 것 하나를 집어 들어 냄새를 맡으려다 보니 노랗고 매끄러운 부분에다 누군가가 한자 몇 글자를 끼적여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과일 망신은 모과 시킨다지만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누가 과일에 낙서를 했을까 하고 생각을 하며 글을 읽어보았다.

 ‘苟子之不欲(구자지불욕), 雖賞之不竊(수상지불절)’

  유려한 필체는 아니나 또박또박 쓴 것으로 보아 뜻을 정확히 알고 쓴 모양이다. 어느 고전에 나오는 말 같긴 한데 의미는 잘 모르겠다. 이럴 때는 스마트 폰이 참으로 유용하다. 검색을 해보니 논어의 안연 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만일 탐욕이 없다면 누가 상을 준다고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나도 머지않아 육십 대가 된다. 나이 육십을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그 나이가 되면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금방 이해가 된다고 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나 백세시대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요즘시대에 예순은 청춘이나 매한가지다. 그 나이가 되면 과연 이순의 경지에 이르게 될까 하는 의문이 아니 생길 수가 없다.

  이순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삶의 도리를 이해하게 되어 무리한 욕심 또한 자연히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탐욕이란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면 이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글귀가 쓰인 모과를 코에 가까이 대고 가만히 냄새를 맡아보았다. 흉하다는 생각보다는 본래의 모과 향에다 고전의 향기가 더해져 향이 더욱 그윽해진 느낌이다. 나이 육십 대를 모과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이순을 말한 것이 아닐까 싶다. 육신의 힘은 예전만 못하나 마음은 따뜻해지고 무르익는 경지를 이른 듯하다. 참으로 절묘한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나와 살면서 나이 육십에 모과 같은 향기를 풍길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