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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해설

이명은 시집「할미꽃 편지」서평

이명은 시집할미꽃 편지서평

                          

                                                                  이상향에 대한 이미지와 울림

 

                                                                                                                                                                                           윤 제 철

 

1. 들어가는 글

 

   글을 쓰고 싶은 꿈을 꾸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꾸었던 꿈이 살아 있는 동안 어느 때라고 지정 되어 있지 않지만 한번은 작정을 하고 도전해보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말을 할 줄 알고 한글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쓸 수 있다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와 노력, 그리고 결단이 함께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고 결단을 내리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잘 써야한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도전에 성공한 사람들은 잘 써야겠다는 욕심보다는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듯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각자가 해야 할 일로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현실에서 시간을 만들어 틈틈이 시를 쓸 수 있는 역량은 시와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만나고 싶을 때 미루고 미루고 이 순위 삼 순위가 되면 결코 시를 쓰지 못한다.

   이명은 시인의 시를 읽어보면 마주하지 않아도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장기 하나 없는 맑은 얼굴을 한 시편들이 모두 숨결을 지닌 채 한자 두자 가까이 다가와 독자들을 만나려 애쓴다. 모든 작품들이 한 결 같이 고르게 수준을 유지하고 제몫을 다하려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눈에 보인다.

   시집을 내시겠다고 가져오신 시 원고를 먼저 읽을 수 있는 영예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축하의 의미를 담아 몇 편의 주요시를 독자들이 감상하시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2.이상향에 대한 이미지와 울림

 

봄이 오는 소리에 내 고향

뒷동산에 올라

양지바른 길섶

전설의 꽃 할미꽃 아홉 송이

젊어서도 꼬부라지고

늙어서도 꼬부라지고

하얀 고깔을 쓰고 피를 토하듯

붉게 피어난 노오란 꽃술

 

내 할머니도 할미꽃이었고

내 어머니도 할미꽃이었고

나 또한 여기까지 왔구나.

 

얼마 남지 않은 그 길

열네 살에 쓴 편지 한 장

할머니가 되어 전해져간 그 편지는

구름 바람 맞아도

달빛 별빛 맞아도

할머니가 되어서 간 퇴색된 글

그 편지를 가보로 남기겠다는 말에

천년 묵은 마음을 풀고

초목의 꿈은 아직도.

-할미꽃* 편지전문 *할미꽃 : 동네 오빠

 

   봄이 오면 생명을 가진 것들이 모두 반갑게 뛰어나간다. 내 고향 뒷동산에 올라 젊거나 늙거나 할미꽃은 꼬부라진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도 얼마 남지 않은 길을 걷는다. 열네 살에 쓴 편지 한 장이 할머니가 되어서 간 퇴색된 글이다.

   가보로 남기겠다는 말에 신이나 초록의 꿈을 아직도 피우고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 마을을 뛰어다니며 우리는 동심을 먹고 산다. 아이들 앞에서나 어른이지 어른끼리는 아이여야 한다. 젊어서도 늙어서도 할미꽃이지만 동심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겸연쩍게 밝히는 할미꽃은 동네 오빠라고 귀띔하며 얼굴을 붉히고 아직도 녹슬지 않은 순애보(殉愛譜). 편지는 상대편에게 전하고 싶은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낸다. 가슴에 담고 있는 생각들을 아직도 시들지 않은 초목으로 마음을 풀어 내고 있다.

 

여학교 시절

소낙비 쏟아지던 날

토란잎 우산 삼아

교복 다 젖어도

경이랑 서로 쳐다보며 깔깔

기억에도 없을 토란잎 우산

 

추억에 젖어

앞마당 꽃밭에 토란 심었더니

새벽별 기울면

젖은 안개 이슬 살포시 내려와

은구슬 소복이 옥구슬 함초롬히

아침이면 마음의 부자가 된다

 

수 없는 세월이 지나간 지금

아름다운 추억하나 붙잡고

이름 하나 가슴에 안고

꿈으로 엮은 그리움을

하루 피고 지는 토란 꽃잎에 새기면서

햇살이 퍼지면 은구슬도 옥구슬도 어디로

- 토란잎 우산전문


   비가 올 때 머리에 받쳐 비를 가리는 물건이 우산이다. 토란잎이 넓다하더라도 손으로 들고 몸을 가리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능성 하나 들고 서로 쳐다보며 깔깔거릴 수 있어 좋았던 추억이다. 비를 받히는 그 좁은 공간에 우정이 살아 꽃도 아닌 토란을 앞마당 꽃밭에 심어 추억을 키웠다.

   아침나절 하루를 열면 이슬 살포시 내려와 소복이 옥구슬 쌓는 부자가 되었다. 이제까지 꿈으로 엮는 그리움으로 남아 소녀시절로 다녀오는 출구가 되었다. 햇살이 퍼지면 어디로 가는지 신데렐라처럼 가버리는 토란잎 옥구슬이다. 추억의 나라에서 나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신비스럽기만 한 기억 하나하나가 종합영양제가 되고 얼굴에 주름도 날려 보내며 생기발랄한 친구랑 웃던 순간을 가슴으로 만난다.

 

꽁꽁 얼어붙은 이 겨울 한밤은

내가 집을 지키는지 집이 나를 지키는지

문풍지를 뚫는 바람이 너무 차다

 

잠은 오지 않고

칼바람에 서걱 이는 낙엽 날리는

소리까지 파고드는 이 밤

 

가슴이 무너진다

지난 사연들이 너무나 설웁게 다가서는데

 

봄이 올까, 오는 그 봄을 볼까

겨울 한 밤 지새우며 기와집 열두 채를 짓는다

-문풍지전문

 

   문풍지는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문짝 주변에 바른 종이다. 문짝과 문틀에 틈이 나면 문풍지는 바람을 막지 못한다. 2중창도 아닌데다가 창호지 한 장 사이로 나눠지는 내외부의 경계를 소음뿐만 아니라 지난 설움까지 뚫고 다가서니, 오죽하면 얼어붙은 이 집을 화자가 데우는가 집이 화자를 데우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자다가 깨서 잠이 오지 않는 고충을 모르고는 노인이라 하지 말라고 했다. 수만 가지 궁리를 한들 뾰족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원망스럽게도 잠은 오지 않는다. 결국에 가서 추운 겨울을 모면할 수 있는 봄이 오긴 오는 걸까, 아니 그 봄을 볼 수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계가 없는 상상의 세계는 무언가 절박하게 요구되어지는 방향으로 항정 없이 열린다. 문풍지는 심장의 판막처럼 닫혀져 한 쪽 방향으로만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별 하나에 웃었고

별 하나에 울었고

별 하나에 노래 불렀지

별 하나에 첫사랑 묻었지

그 많은 별 중

나만 보면 웃어주고 울어주고

노래 불러주던 별 하나 있었지

이젠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기력도 시력도 없어져

그 별님을 보내야겠기에

육십육 년 만에 그냥 보냅니다

어느 별에 살든 그리워 울던 때는 가고

내 몸 주체 안 되어 놓아드립니다

무심히 데리고 간 그 세월

달빛 별빛 어린 강가에서 첫사랑

별님을 목 놓아 불러봅니다

-첫사랑별전문

 

   맨 처음으로 느끼거나 맺은 사랑을 첫사랑이라 한다. 별 하나에 울고 웃던 그 별을 그냥 보내야했다. 화자가 첫사랑을 별로 가정하여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고 싶었다. 그 별이 자신만 바라보는 줄 알고 육십육 년 만에 몸을 주체 못하여 그냥 놓아주었다. 같이 했던 세월을 데리고 간 별님을 목 놓아 불러보았다.

   사랑을 하면 어떤 짓을 해도 좋아 보인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그 대상이 나타나면 모두가 순간에 해결되고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신비스런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치유가 되는 효력이 있다. 세상을 다 가지고 있는 듯하다.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사랑이다. 세상에 영원한 게 없는 것처럼 하늘에 별 마냥 멀어진 첫사랑을 아쉬워한다. 이미지만 남겨놓고 돌이켜 놓을 수 없는 세상사가 야속하기 만하다.

 

인자하시고 온화하신 시어머님 청주한씨

이 세상 좋은 말, 다 해드리고 싶은데

장날에는 시아버님, 어머님 내려오시면

막내 시누이는 어련히

사촌 시누이 까지 같이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 옹기종기

어른들께는 고기반찬 시누이는 햄 만두

시어른보다 시누이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온 세월이 훌쩍 지나가고

때론 말다툼해 사이 벌어져 있는 것을 눈치 채시면

어머님 아버님 언제나 내 편 들어주시고

아들을 야단치시면서

다시는 너희 집에 안 온다고 가시지만

그다음 장날이면 내려오시어

좋으면 너무 좋고, 슬프면 너무 슬퍼

격차가 커 몸 다칠 수도 있어 걱정이라면서

아들을 항상 주의 주시던 아버님 어머님

부족한 며느리였지만 어머님은 내 편

배운 대로 내 며느리에게 좋은 시어머니 될게요

-시어머님은 내 편전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일어나는 고부갈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며느리가 잘못이 있건 없건 아들 편에 서서 불란을 일으키는 것이 시어머니였다. 그런 과거의 세태에서 며느리 가 시어머니를 내편으로 자부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말다툼해 사이 벌어져 있는 것을 눈치 채시면서도 언제나 아들을 야단치시면서 내 편을 들어주셨다.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 보다 행복하다는 마음가짐으로 세상사 모든 일을 대하는 화자였다. 시어머님을 통하여 거울처럼 바라다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늘 부족한 며느리로 지고지순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은 사랑이었다. 손위에서 손아래로 일방적인 압력 보다 배려로 이끌어주셨던 시어머님을 따라 그런 시어머니가 되겠다는 눈물겨운 각오가 공감과 감동으로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손자 손녀 셋이서 서로 옆에 눕겠다고

첫째 손녀는 오른팔 베고 둘째 손자는 왼팔 베고

세 살 베기 셋째는 자리가 없으니

한참 서서 내려가 보다가

할매 우리 거꾸로 자자한다

누나와 형에게

막내 재워 놓고 이쪽으로 오꾸마 달래놓고

정말 거꾸로 누워서 막내를 재운다

자다가 보면 동서남북 몸부림에

내 자리조차 없어진다

옛날에 내 자식 키울 때 써먹었던

궁댕이 송송하고 간질이면 벌떡 얼어나서

승민이는 할매 찌찌 송송 이라고 받아친다

손주들이 얼마나 이쁜지 그 재롱에

가는 세월이 아까워 아까워서

지는 해가 미워지는 걸 어쩌노

-거꾸로 자자전문

 

   요즘은 잠잘 때 침대가 있고 예전과 많이 다르다. 요와 이불을 깔고 덮는 절차가 필요했다. 손자 손녀 셋이서 서로 옆에 눕겠다고 야단들이다. 세 살 배기를 거꾸로 재우고 자리를 만드느라 판을 흔드는궁댕이 송송하고 간질여 재롱을 보는 재미에 가는 세월이 아깝다.

   할매는 이제 위엄이 다가 아니다. 같이 놀아주는 할매가 좋다. 어린애처럼 동심을 주고받아야 한다. 아이들도 좋지만 할매도 좋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친구 마냥 가깝게 벽이 없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는 시간에 하는 놀이가 되었다.

   손주들이 이쁜 것 보다 친한 친구가 옳다. 이따금씩 자식인 애들 부모한테 혼나기도 하면서 격이 없이 논다. 얼마나 좋은지 지는 해가 미워진다.거꾸로 자자는 놀이며 장난치는 중에 일상적인 대화에서 쓰는 말로 된 문체로 생성(生成)된 시로 승화되었다.

 

3.나오는 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관찰을 통해 감각을 동원하여 느껴지는 하나의 시상으로 만난다. 어떤 매체를 불러들여 화자 자신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매체로 하여금 이야기를 하도록 만든 것이 시가 되었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하여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비유하고 주제를 감추어 독자로 하여금 찾아낼 수 있도록 한 고개 두 고개를 넘어 스무고개라도 넘어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이명은 시인은 어린 시절 일상에서 겪는 어떤 대상에서 비롯되는 충동으로 형성되는 두 가지 인격형성 측면을 보여준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통이 이루어져 원만한 경험으로 정신영역을 확장하고 의식구조를 견고히 다지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지만, 마음속에 피우지 못한 이상향을 간직하고 현실과는 다른 정신세계에서 그리움으로 남아 모든 꿈의 원천이 되었다.

   이명은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서민적인 안목에서 그려지는 순수한 내면의식은 꾸밈이 없이 솔직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려주는 시의 목소리는 투명하고 생동감을 자아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시속에 담겨진 역사와 문화의 결합은 관심을 나눌 수 있는 내용들이 공감대를 넓게 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데 유리하다 할 것이다.

   사물을 대상으로 한 관찰은 비유되는 움직임이나 생김새에서 유발되는 사건의 발상에서 종결까지 같은 리듬으로 절묘하게 보여주는 가운데 이미지화에서 오는 울림은 모든 시편에서 기대치보다 훨씬 크다. 사유의 세계를 마음껏 비행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함축, 은유, 상징으로 갖춘 시의 요소를 충족시켜 보다 시야가 넓고 사고력이 깊은 시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시집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