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사

내 문학의 습작기 - 시인의 집, 창조문예를 찾는다

내 문학의 습작기 - 시인의 집, 창조문예를 찾는다



윤 제 철


 문학에 대한 꿈과 희망이 싹트던 시기는 바로 70년대 초반에 구성되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동인시인의 집(회장 강병석)이다. 이전만 해도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던 고 안명호(安明鎬) 시인의 시 동인지시혼(詩魂)을 선물 받고 시창작의 게기가 된 이래 대중잡지에애독자 문예란에 투고를 해왔었다. 그러던 중에 대학 졸업반에 월간시문학전국대학생 작품공모에서 입상하였다.

  대전에 살았던 필자는시인의 집에 창립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대전에 살고 있었기에 모임에 참여는 못했어도 동인지에 작품을 실었고 시화전에도 참여하였다. 1974년에 발간된 첫 동인지가멍석이다. 그후 100여명이 넘는데다가 전국에 흩어져 있는 회원을 관리한다는데 무리가 있어 중단되었지만 회원 중에 뜻을 같이했던창조문예(회장 고영표),맥심부락,황토,문예강산등에 남게 되었다. 필자는창조문예에서 시 창작의욕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동인들이 하나둘 등단이나 개인 사정으로 빠지면서 김인만(소설가), 문창갑(시인), 최봉섭(시인)과 필자가 남아 숙대 앞 카페에서 시화전을 열면서 막을 내린 것은 1983년이 저물던 12월이었다.



  뜻을 같이 했었던 회원 중에 현재 연락이 된 분들은 정건섭(추리소설 작가), 양준호(시인), 고영표(시인, 칼럼리스트), 박재화(시인), 장재훈(시인), 김완용(시인), 필자였다. 교보문고 시집 코너에 모여 인근 식당으로 찾아간 날은 2017717일 제헌절이었다. 그 외 몇 분이 더 있으나 여건상 참석을 못하고 있다.

  3십대 초반에 서있던 나이가 이젠 7십을 바로 앞에 두거나 넘어 서있다.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아 만남의 장을 열고자하는 것이다.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다시 찾고 싶었다. 추억이 무엇인지 우리를 불러 모았다.

  점심식사를 나누며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꺼냈다. 글을 쓰기 시작했던 계기에서부터 성공한 결과물에 대한 소회도 잊을 수 없었고 앞으로의 기대치에 대한 구상도 털어 놓았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의미를 새기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만날 것을 다짐하며 사진을 남겼다. 사진은 김원용 시인이 보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