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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강화교동문학기행

강화교동문학기행

 

1.들어가는 글

 

  2016518일이다. 두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을 양양을 다녀오기로 했다가 12일은 의미가 없다며 강화도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며칠 전에 변경한 것이다. 아침 10시에 김포우리병원앞 버스정류장에서 만나기로 문자를 받았다. 김동진 회원은 승용차를 옆에 대고 유두희 회원과 필자는 정류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수역에서 가는 필자는 동작역에 가서 9호선을 타고 김포공항까지 급행을 타고가서 5호선을 타고 송정역으로 갈 수 있어 조금 먼저 갈 수 있었다.

  창후리입구를 지나 출입증교부를 받고 교동대교로 진입하는 인화삼거리에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교동시계탑옆에 나웅환 작사, 조성호 작곡, 교동의 노래비 2014년 봉소리 주민들이 설립하고 신태식님이 증여한 것이다.

 

2.대룡시장

 


















 

 고구저수지를 지나 대룡시장을 들어갔다. 대룡시장은 6.25때 연백군에서 교동도로 잠시 피난온 주민들이 한강하구가 분단선이 되어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을 본 따 만든 골목시장이다. 30여 년간 교동도 경제발전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시장을 만든 실향민 어르신들이 대부분 돌아가시고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시장규모도 상당히 줄었다.

  그러나 20147월에 교동대교의 개통과 함께 1960년대 영화세트장 감은 대룡시장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관광명소로 떠오르게 되었다. 바로 교동 시간이 정지된 거리였다. 사람들이 거주하며 이용하고 있음에도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발소나 다방, 찹쌀 꽈배기, 강냉이 뻥튀기, 거리에 붙은 가족계획이나 건설, 식량을 지키기 위한 쥐잡기 표어들이 추억을 더듬게 한다. 점심식사를 위해 주민들의 도움을 청해 소개받은 곳은 해성식당이다. 간판에 상호 밑에 곁들여서 정성을 다해 조리합니다.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세요라고 써있었다. 소머리국밥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다시 시장을 돌아 나오다가 김흥기 시인의 시가 눈에 띄어 읽어보았다.

 

뭉실뭉실 구름이 자유로이 노니는 것은/ 넘칠 듯 가득한 독수를 쏟았기 때문이라고/ 천둥은 먹구름 더러 그렇게 외쳤지/ 가슴 꽝꽝 두드리며/ 비우면 가볍다고/ 가벼우면 날 수 있다고/ 천둥은 먹구름 더러 또 그렇게 다그쳤지/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도는 먹구름들이여/ 보라! 호령소리 들리지 않느냐/ 몸 줄어 가뿐한/ 저 뭉게구름 보라고

- 김흥기의 먹구름전문

 

3.교동읍성




 

  교동읍성을 찾았다. 인천시강화군교동면읍내리577 일원에 있었다. 조선 인조 7년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하면서 돌로 쌓은 읍성이다. 둘레 430미터 높이 6미터 규모로 세 개의 문을 두고 문루를 세웠는데 종문은 통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 하였다. 영조 29년에 여장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년에 남문을 다시 고쳤으나 종문과 북문이 언제 없어졌느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지금은 홍예문만 있다.

  돌을 쌓은 것을 보면 돌의 폭이나 높이가 맞지 않았을 때는 빈틈을 깎아 맞추는 정교함을 보여주고 있다. 읍성을 연결할 수 있는 구조물들은 없고 그 자체만 동그마니 남아 있었다.

 

4.월선포

 





  교동대교가 설치되기 이전 까지 배를 타고 교동도로 건너갈 때 선착장으로 쓰이던 곳이 월선포다. 배가 줄을 서서 기다렸던 기억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쓸모가 없어져 한산하기만하다. 선착장으로 쓰이던 곳이 간판은 그대로 있는데 중개인사무소로 쓰이고 있었다.

  전국 어디서나 텍배가 가능하다는 교동 믿음섬쌀 가게의 간판이 서서 지나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발을 끊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다. 전방지역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부대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관광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경건하여서인지 거리나 주변 시설들이 깨끗하고 정갈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5.교동향교

 












  교동향교는 고려 충렬왕 12년에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조선 영조17년에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북족 기슭에 있었던 것을 남쪽 기슭에 옮겼다. 향교 안에는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의 유현들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과 좌우에 선현들을 제사지내는 동, 서무를 두었고, 유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명륜당과 동, 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 , 외삼문이 있다.

  유별나게 다른 것은 굴뚝이었다. 바닥에서 수직으로 올라간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바갇으로 수평으로 누었다가 일어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건물 한 동에 하나가 아니고 실 마다 하나인 것도 눈에 띄었다.

 

6.화개사




 

  화개사는 교동면 화개산 기슭에 위치한 작은 조계종 사찰이다. 사찰 창건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시대 문신이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글에 보면 개성에서 이곳 강화도 교동도의 화개산에 들어와 학문에 전념하였다는 기록으로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약간 언덕 진 곳에 위치하여 법당을 앞에 두고 돌아서 들어가도록 되어있었다. 법당은 작은 건물 한 동으로 세워져 있었다. 비구니스님 한 분이 일을 하고 있을 뿐 한적한 산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법당 앞에서 내려다보면 몇 계단 밑에 푸른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고 가까이 바다가 보이고 건너편 석모도가 고즈넉이 앉아 있었다.

 

7.연산군 유배지



 

  연산군 유배지는 네비게이션으로 찍어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물어도 잘 알아듣지 못해선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돌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보고 싶었다. 최근에 방영된 화정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광해군을 재조명한 내용에 공감을 했었기에 연산군에 대한 다른 시각은 없는 것일까? 연산은 재위 12년간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수 많은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를 잔인한 형벌로 희생시킨 참극을 벌였던 임금이다. 위리안치란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귀양간 곳의 집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곳이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어 두 달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고려궁지

 






 

 교동대교를 건너와 출입증을 반납하고 고려궁지로 들어갔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궁궐로 건립하였던 곳이다.(1234)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고의 조건부 퇴각을 명분으로 36년 만에 파괴되었다.(1270) 강화유수부로 승격하여 조선행궁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으로 건물 일부가 불에 탔다. 유수부 동헌을 개축하였고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외규장각을 왕립도서관으로 건립하였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조선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으로 많은 건물이 불에 탔다.(1866) 그 후 강화궁지 사적 지정되었다.(1964),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1977), 외규장각 복원(2003) 빈터에는 유수부 동헌이나 외규장각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수부 동헌은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건물이다. 인조 15년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다. 영조 45년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하였다. 명위헌이라는 현판은 명필인 윤순이 쓴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8,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외규장각은 고종 3년 대원군이 천주교 탄압과 프랑스 신부 11명 처형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으로 양민을 학살하고 외규장각의 6천권이상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왕실 문서와 은과 수천 냥을 약탈하였다.

  강화 외규장각 의궤 귀환은 1975년 박병선 역사학자에 의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뱍병선 박사와 시민단체, 정부가 협력하여 의궤반환운동이 추진되었고 1993년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1822(순조 22, 1권이 먼저 반환되었다.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 중 대한민국 프랑스 양국정상의 합의가 체결되고 후속 조치에 따라 외규장각의궤가 돌아오게 되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강화외규장각 의궤297권이 145년 만에 모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9.남문로 7 커피

 












 

 차를 한 잔 마시고 가자는 말에 들어간 곳남문로 7 커피점이었다. 진입을 하는 통로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풍이었다. 보통 땐 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오늘은 카푸치노를 마시기로 했다. 김동진 회원의 추천으로 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펴보니 인테리어가 만만치 않았다. 고풍스러운 손길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커피가 나오면서 박하사탕인줄 알았는데 흰떡을 쓸어 구운 것이 나와 차향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메밀차가 노랗게 우려진 따뜻함이 흘렀다. 높은 온도에 흘린 땀을 말리고 다음에 한 번 더 오고 싶은 미련을 남기고 일어서애 했다.

  나오면서 어느 대가 집인지 뜰로 연결되어 발길을 옮겨보았다. 들은 이여기는 백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 당시 3달을 묵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한옥으로 오래된 집은 기와지붕에 잡초가 무성하였다. 장독대와 작은 꽃이 담겨진 화분들이 옹기종기 앙증스럽게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10.나오는 글

 

  오늘 볼 수 있었던 것을 초과달성한 기분이 들었다. 예상하지 않은 좋은 곳들을 점으로 만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필자는 오후 6시에 5호선 공덕역에서 다른 모임을 참여해야 했다. 도로가 막히는 것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 수가 없어 좋기도 하지만 몰라서 답답하고 당황스러운 일을 겪는 게 보통이다.

  차를 몰고 안내해준 김동진 회원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일정을 소화해준 유두희 회원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감기로 고생했던 몸이 다소 추슬러져 버틸 수 있었던 내 자신에게도 감사한다. 여전히 김동진 회원은 헤어지면서도 다음엔 안간 강화도로 가자고 했다. 7월 달에 말이다.

  다시 송정역으로 버스를 타고 가기도 바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즐거우면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애초에 겹치는 줄 알면서 약속한 것이니 내 몫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40-50분은 늦을 것 같다


2016년 5월 22일

윤 제 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