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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2014년 대전고 49회 대전, 서울합동 야외수련회를 다녀와서

2014년 대전고 49회 대전, 서울합동 야외수련회를 다녀와서

 

윤 제 철

 

1. 들어가는 글

 

 2014년 8월30일 아침이다. 대전고등학교 49회 대전, 서울 합동수련회를 화양계곡에서 한다는 연락을 몇 번이고 받아 참석을 하기로 하였다. 아침 9시 40분쯤 집에서 나와 사당역으로 향하였다. 10시가 다되어 기다리고 있던 45인승 대형버스에 올라탔다.

 거의 대부분 참석동문들이 도착되어 있었고 몇몇을 기다려야했다. 지역동문모임에 비하여 출석률이 다소 떨어졌다. 헐겁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주 보는 얼굴들이 반가웠다. 졸업을 하고 같은 반을 안했어도 얼굴을 익혀 알게 된 친구들도 많다.

 이번 모임은 서울에서 주관하여 행하는 모임이라 서울재경 이재성 회장과 유정호 총무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각 지역회장과 총무들도 도와주고는 있어도 어디 그만 하겠는가, 내가 나가고 있는 강서지부 황동준 총무한테 많은 도움을 못주고 있어 미안해서라도 참석하자는 게 참석이유랄 수 있다.

 허영부 부회장이 배즙에다 소주를 살짝 탄 술을 나누어줘 취기도 없이 달달한 게 좋았다. 안주로는 과자류를 안겼다. 술이란 놈은 취하지 않아도 말문을 열어주는 능력을 가졌다. 뒤에 앉은 카페지기 박성권이와 카페에 공을 들인 사람에게 주는 상이야길 나눴다. 모두가 아는 사람들이 공을 인정하여 주고받는 상이 가치가 있고 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받은 포도주를 아직도 안마시고 보관하고 있는 나 또한 그 상이 소중한 보배이니 말이다. 상마다 제 각각 다른 말로 엮어 축하의 의미를 담아주는 그의 열성 또한 대단하다.

 달리던 버스가 중간에서 한 번 쉬었다. 소변을 보고 가자는 거였는데 화장실이 따로 없어 자연 간이 화장실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별 수 없이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고 마니 신기한 일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얼마 안가서 목적지 근처 식당이었다.

 

2.만남

 

 대전 친구들이 내외 동반하여 식사를 마치고 일부는 밖에 나와 있었다. 그중 김환영 내외가 반겨주었다. 환영이 부인은 한 때 직장 동료였었다. 얼마 전에 제자가 연락을 해와 반가웠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식사 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미스타 대고였던 조남원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내가 들어간 방에 대전의 가수 전순호가 반겨주었다. 그리고 대전 전회장이고 외고교장으로 퇴임한 김원명이 들어왔다. 자주 드나들며 막걸리를 갖다 주던 대전 총무 신중호가 간편복 차림으로 뒤에서 보니 식당 주인처럼 바빴다.

 점심을 먹고 이홍근이 몰고 온 벤츠를 타고 갈 기회를 얻었다. 숙소가 있는 충북자연학습원은 10분 거리였다. 계단에 앉아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방 배정을 받아 찾아갔다. 가령 102호실이었다. 소지품을 내려놓고 발야구 외 몇 가지 체육대회를 한다고 나오라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야외 공연장 무대에는 서진석이 일찍 승용차를 몰고 와 음향기기를 설치하고 있었다.

 

3.체육대회 및 장기자랑

 

 

 

 

 

 

 

 

 

 

 옆에 언덕 위에서 발야구를 이현우가 심판위원장을 맡아 진행되었다. 1회 초에 4점을 앞서간 대전 팀이 이기는 줄 알았는데 2회 말에 7점을 딴 서울 팀에 고전하였다. 3회 초와 말에 서로 5점식 주고받았지만 4회 초에 1점을 만회하는데 그쳐 5회 공격마저 점수를 못 내고 경기를 마치는 바람에 12대 10으로 서울 팀이 이겼다. 그 외 허영부의 아이디어로 훌라우프 돌리기와 새총 쏘기 등 재미를 더하는 오락성 경기가 이루어졌다.

 식당은 숙소 아래층에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다시 장기자랑 및 캠프화이어를 위해 야외 공연장으로 나갔다. 진행은 허영부가 맡아주었다. 첫 스타트는 서울 이재성 회장이 끊었고 덕영이 부인이 분위기 메이커로 춤을 선사하였다. 그러고 나서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김창규의 대금 연주와 서진석의 섹스폰 연주가 일품이었다.

 나도 무대에 올라설 기회가 주어졌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안명호 선생님을 추모하는 시와 제주도 여행 숙소에 얽힌 시「하귀리에서」를 읽었다. 하귀리는 제주시애월읍에 있는 동내 이름이다. 바닷가 고향집 같은 집을 빌려준 와이프 친구 분께 대한 고마움의 시였다.

 

 

 

 

 

 

 

 

 

 

잠을 자던 꿈을 깨워

언제나 일으켜 세우고

어린 나이일지라도

이 세상은 관심을 갖고

사람 됨됨이를 달아보는 저울이 있다고

나를 추슬러주시던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선생님

 

같은 길을 걷는 동지가

제자 중에 있다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말없이 행동으로

문을 열어 안내하신 손길

오래 오래 놓지 않겠습니다

 

똑똑한 듯 멍청하게 사느니 보다

멍청한 듯 똑똑하게 사는 것이

나의 가치를 높인다며 채근하신

눈빛을 가슴에 새깁니다

 

간결하고 예리하게

이 세상을 향하여 노래하시던 이상향이

끝없이 펼쳐지는 나라에서

모든 아픔을 떨쳐내시고

홀가분한 새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 추모시「안명호 선생님」전문

 

몇 친구의 노래가 이어지다 캠프화이어에 불이 붙였다. 많은 캠프화이어를 봤지만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로 돌아간 듯 나 자신을 추슬러보는 순간을 맞았다.

 오후 10시까지만 허용된 행사였다. 수련원 측에서 주민들을 위한 고성방가를 막자는 듯에서였다. 행사 흔적을 모두 거두고 숙소로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방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열린 방의 모습을 보면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4.화양계곡 산책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날은 밝아 빨리 일어나라고 했다. 룸메이트 중에 한 사람인 신창호는 행방불명이었다. 아디로 갔을까, 신출귀몰한 그의 정체가 궁금하였다. 아제 못한 샤워를 하고 식당으로 갔다. 행복한 미소 속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친구들은 화양계곡으로 산책을 나갔다. 걷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 짝꿍이었던 영부와 그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시를 습작하던 시절 보여준 거 생각나느냐고 묻자 영부는 내가 보여준 짧은 소설 하나를 기억한다고 했다.

「학소대」를 먼저 들렸다. 학소대는 화양구곡 중 제 8곡으로 큰 소나무들이 운치있게 조화를 이루며 우뚝 솟은 바위산으로「청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하여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내려오다가 파천으로 들어서다가 작은 돌을 짊어지고 서 있는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 발길을 멈추었다.

 

파천에 들어서는 입구에 외로이 선 바위

이곳에 온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작은 돌 하나 올려놓고 빌었네

 

제각기 다른 걸 이루려고 소중하게

말없이 올려놓은 게 가득히 쌓여

세찬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고

 

꿈이 펼쳐지는 날까지 붙어 있을 듯

있는 힘을 다하여 버티고 설 바위

나도 하나 올려 그날을 기다려야지

- 졸시「꿈 올린 바위」전문

 

「파천」은 화양구곡 중에 제 9곡으로 계곡 전체에 흰 바위가 티 없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위에 흐르는 물결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여 파천이라 부르며,「신선들이 이곳에서 술잔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우리는 물가에 앉아 이 또한 인연이 아닌가, 김치에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었으니 신선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닐까? 맑은 공기를 마시며 때 안 묻은 동심을 나누며 시간 가는 것이 아까울 뿐 부러울 것이 없었다.

 

5.헤어짐

 

 

 

 체크아웃을 하고 송어회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숙소로 올 때처럼 이홍근의 차로 식당엘 갔다. 식당 입구 수조에는 알이 굵은 송어가 떼로 몰려들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물 좋은 회를 받아들고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일이다. 맛을 보고 웬만큼 술이 오를 무렵 가수 전순호의 노래를 맛 뵈기로 노래 좋아하는 목청 좋은 친구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안주가 좋아서 술을 더 먹게 되었다며 다가올 헤어짐에 대비하고 있었다. 수조 안에 송어를 들여다보는 친구, 수련회 내내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치구, 자주 보자고 안타까워 워하는 친구들이 한 마당 가득 서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가 나타나자 악수를 하거나 서로 껴안으며 이별을 고하였다.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고등학생으로 돌아가서 좋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사회 친구 처럼 말을 올려야 되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이니 말이다. 그렇게 차는 훌적 떠버렸다. 손을 흔드는 손이 보이지 않았다.

 

6. 나오는 글

 

수 련회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이런 기분을 알 수가 없었을 거다. 조금 귀찮다 해도 움직여 나오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앞으로 건강하게 팔십을 산다 해도 불과 십 사년에서 십 칠년 정도 남아있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리 많은 세월이 아니다.

 알차게 보내야할 의무가 있다. 아까운 시간이 자꾸 흘러가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어렸을 적 친구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나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노릇을 하지 말아야한다. 내일은 내가 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행사를 위해 애써준 모든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참석하지 않은 친구들에게도 감사한다. 오지 않았어도 마음은 모두 여기에 와있었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모두들 건강한 몸으로 다시 보자꾸나.

 

2014년 9월 2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