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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 황금찬 편

 

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황금찬 시인 편

 

 

윤제철

 

 

1. 만남

 

 

 1월 23일 목요일 낮12시, 쌍문동 황금찬 선생님 댁을 방문하기로 약속한 시간이다. 많은 시인들이 계시나 우리 문학사를 빛낸 시인들을 이야기하면 작고하신 분과 생존하신 분으로 나눌 수 있다. 편집진에서 나이 드신 원로 시인들을 먼저 찾아뵙고 작품세계나 근황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로 했다.

 시인의 대명사로 떠오르시는 황금찬 선생님을 우선순위로 한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금년 97세의 고령에도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쌍문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 댁 앞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 보다 3분 정도 늦은 시간이었다. 먼저 문을 열어 반갑게 맞아 주사는 노시인의 손길이 따뜻하였다.

 마침 정오 뉴스를 보시다가 손녀가 정성껏 내놓은 차 한 잔을 테이블에 받았다. 종합문예월간「문학세계」와 시 전문지 계간「시세계」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시는 선생님은 잡지 만드는 일이 잘되는지 걱정하시면서. 직접 나서셔 만드시던「시 마을」을 14년이나 운영하시다가 빚을 지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격려해주셨다.

 

 

2. 최초 추천 문예지「문장」

 

 

 우리나라 최초의 문인추천은「문장」지에서 비롯되었는데 불과 2년을 유지하고 1940년에 폐간되었다. 시와 시조는 3회 추천, 소설은 2회 추천으로 완료되었다. 발간 5,000부를 하면 남한에 2,000부가 팔리고 북한에 3,000부가 팔렸다고 한다. 처음 추천을 완료한 분은 시에 정지용, 시조에 이병기, 소설에 이태준이었다. 폐간이 되자 일본책 서점만 있고 우리말 책 서점은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조지훈 시인이 시「와나삼」을 박목월 시인께 보이자 우리말 글은 끝이라며 통곡하고 써 보인 시가「나그네」였던 것이다. 결국 황금찬 선생님께서도「문장」지에 등단의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말았다. 추천 못 받은 사람들은 운명적 슬픔 앞에 함께 울어야했다.

 

3. 창작동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게 된 동기는 1926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펴낸아이생활」을 읽으면서 부터였다. 어린이 교육의 길잡이로 가곡·동화·동요·동시 등의 문학작품과 역사사화, 성서이야기, 주일학교 교육자료 등을 실었다. 초대 발행인은 나의수(羅宜秀), 편집인은 정인과(鄭仁果)였고, 그뒤 발행인은 홀드 크로프트, 본윅 등으로 바뀌었다. 총무는 유형기, ·스톡스,·백낙준 등이었고, 편집인은 전영택,·한석원,·주요섭 등이 맡아보았다

 기독교 가정의 어린이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어린이들이 읽어 당시 어린이 잡지로서는 최고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세계명작들까지 실려 어른들까지도 읽을 수 있게 편집되었으나 일제 말기에는 내용의 많은 부분을 일본어로 표기해야 했고 덴노 및 일본의 대륙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실어야 했다. 해방 후 대한예수교서회에서 이 잡지의 뜻을 이어받아「새벗」을 창간했다. 당시 책값은 10전이었는데 가난한 생활 형편에 살 수가 없어서 둘이서 5전씩 내고 사서 번갈아가며 읽어야 했다.

 

 

4. 강인산(姜仁山)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잊지 못할 스승이 계셨다.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신 강인산(姜仁山)선생님이시다. 일본 사람 밑에서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는 강한 주체사상을 지닌 분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그 분께 차나 한 잔 하자시면 차는 무슨 차, 칼국수나 한 그릇 먹지 할 정도였다. 그래서 늘 직장이 신통치 않았다.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했던 백림 올림픽이 열렸을 때 그분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보아야한다고 말씀하셔서 나라도 없는데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되었는데 그때마다 기도해야 된다는 신념을 키워주셨다.

 그 꿈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이루어졌다. 아무도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마음으로 그리는 하나의 종교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그리스에서 온 셩화를 서울시청 앞에 모신 어느 흐린 날 오후, 외국에서 몰려온 많은 외신기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성화를 다시 붙이는 행사였다. 서울시장, 황금찬 선생님, 그리고 그리스에서 성화를 붙인 여인, 미스 그리스였던 그리스 대사부인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성화」시를 큰 글씨로 써서 준비한 원고를 들고 있었다. 흐리던 날씨가 비를 뿌리기 시작해도 우산을 못 쓰게 하는 바람에 빗물에 번져 읽을 수가 없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자리에 이미 신문이나 매스컴에 공개된 그 시를 적어놓은 수첩을 누군가 내밀어 주었다. 곤경에서 구해준 수첩의 도움으로 다 읽고 나서 수첩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주인에게 돌려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시청에 맡기고 말았다.

 

 

5. 정지용 시인

 

 

 점심식사를 시작해야할 시간에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아지면서 자칫 식사 시기를 놓칠까봐 염려되어 일단 접기로 하고 집을 나서야했다. 손자의 도움으로 선생님과 함께 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집을 나와 동내 식당으로서는 근사한 곳이었다. 커다란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종업원이 대기하고 있다가 방이 불편하시면 의자가 편하겠다며 안내해주었다. 음식이 나오고 맛이 입에 맞아 좋았다. 얼마 전에 한 번 들리셨다 시며 흡족해하셨다.

 정지용 시인 이야기를 꺼내셨다. 시를 한 번도 고친 적이 없는 천재시인이었다. 일본에 「학조」라는 잡지에 기다라하꾸슈는 추천된 시인들만 싣는 지면에 추천이 아직 안된 정지용 시인의 시를 읽고 추천 없이 기성시인 대우를 했을 정도였단다.

 그 후「문학사상」사에서 유명시인들 모임에서 던진 질문 중에 시를 쓸 때 몇 번이나 고치느냐? 는 답변으로 조병화 시인의 한 번도 안 고친다는 발언에 많은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안 고쳤다고 한 그 말은 마음속으로 수백 번을 고쳤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문인은 감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고 감각이 없으면 노력으로 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를 수는 있어도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고 하셨다.

 

 

6. 화가 박수근

 

 

 초등학교 4 학년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가난했던 화가 박수근은 진학을 고만두고 그림에 전념을 하였는데 누구 하나 뒷바라지를 해줄만한 사람은 없었다. 몇 살 위인 화가 박수근과 가깝게 지낸 황금찬 선생님은 같은 환경에서 자란 공감대가 형성되어선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예술가의 우정이 두터웠다.

 미술사적인 박수근의 색채는 물감을 사지 못할 만큼 힘들었던 가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순수한 자연에서 채취한 흙과 돌의 만남은 독특한 색감과 회화기법이 탄생되어졌다. 그려진 작품 중에 한 작품을 받으셨는데 아깝게도 지금은 남의 손에 들려있다. 사모님께서 병환으로 병원치료비를 당시 교사의 봉급으로 충당하지 못하던 그 시기에 팔아서 그 돈으로 내야했다.

 지금 갖고 계신다면 상당한 액수로 호가할만한 작품이지만 치료비에 보태기 위해 28만원에 넘겨야했다. 잘 보관하라는 친구의 약속을 못 지켜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미안하다며 사죄했다고 하셨다.

 

 

7. 이생진 시인

 

 

 식후에 원두커피 한 잔을 권하셨다. 잘 아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마시자고 손을 끌어당기셨다. 걷다가 보아도 카페나 다방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길거리였다. 가까이 가보니「갓 볶은 원두커피 파는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앉아계시던 지인들이 인사를 하느라 일어서셨다. 그리고 커피 대금을 대납하셨다. 벽에는 선생님의 제39시집 출판기념 모임 플랜카드가 아직 걸려있었다. 시집 제목은「추억은 눈을 감지 않는다」였다. 사장님은 반갑게 맞으면서 이곳의 단골은 이웃인 황금찬 선생님, 이생진 선생님, 그리고 임보 선생님이라 했다.

 그리고 어디에 계신지 전화로 연락을 하시더니 가까이에 계시던 이생진 시인과 연결되어 10분 후면 오신다는 것이었다. 뜻밖에 만남이 놀랍기만 했다. 필자가 평소에 마음에 그리던 두 시인을 한자리에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등산을 다녀오시다가 간편복으로 찻집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생진 선생님은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대해주셨다. 강화도 육필문학에서의 행사를 기억하시며 반가워하셨다. 건강한 모습은 늘 부지런하신 시인의 모습 그대로 지니고 계셨다.

 박수근 화가의 이야기 끝에 피카소의 그림과 시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대부분 일기처럼 날짜로 시작하는 시가 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진 않지만 읽어갈 수록 표현에서 느껴지는 감흥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내던 피카소가 입체파로 성장하기까지 겪어야했던 과정을 자세히 알고 계셨다.

 괴팍스런 일면이랄까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아버지의 성 루이스, 어머니의 성 피카소, 이름은 파블로, 그래서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였는데 아버지 성을 빼고 어머니 성만 붙인 「파블로 피카소」란 이름으로 남은 것은 어느 한 인쇄물에서 아버지 성을 빼는 오타가 발생했을 때 아버지와 사이가 나빴던 피카소는 그 때부터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지 않았나 싶다.

 

 

8. 문단위상

 

 

 오늘날 문단에 위상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이 정서적 결핍에 있다고 전재 하에 문학에 관심이 없고 돈이 되는 일만 하려한다고 꼬집으시고, 문학은 간단히 이루어지는 게 아닌데 잘 모르고 덤비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한다고 강조하셨다. 제대로 익지 않은 시인들이 너무 많다. 뿐만 아니라 추천의 기준이 서있지 않다. 배출된 시인들이 추천자의 어떤 영향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분만 아니라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주장이 결여되어 있어 잘못된 일이 있어도 꾸짖어 바로 잡을 수 있는 의지가 없으니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되고 못되는 것을 곧이곧대로 따지고 드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함부로 못하는 것처럼 관심을 갖고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분명하게 따지는 역할을 똑바르게 해야 하는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7. 시세계

 

 

 황금찬 시인의 시는 기독교적 신앙과 인간적인 사랑으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꾸밈 없이 소박하고 진솔한 감정과 맑고 투명한 신앙적 고백을 담고 있다. 보통 기독교적 신앙의 시는 선악의 대결이나 자기희생과 같은 행위적 요소와 사랑과 봉사와 같은 정의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의 시세계는 선악의 상대적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정직한 자신의 일방적인 믿음과 소망을 간구 한다. 따라서 화합과 화해의 부드러운 정조가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만큼 시적 관념이나 이미지의 성격은 투명하다.

 시들은 거의 대부분 일상의 소재 속에서 긍정의 시어를 찾아 진실을 만들고 있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고 무의미에서 의미를 끌어 올리며 가난한 생활환경을 풍요로움으로 변화시키고. 창조적 안목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8. 약력

 

 1918년 8월 10일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셔서 1948~78년에 강릉농업고등학교, 서울 동성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1978~80년 중앙신학대학 기독교문학과 교수, 1980~94년에는 추계예술대학, 숭의여자전문대학,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했다. 1993년부터 2007년까지「시마을」대표를 했다.

 1947년「새사람」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였고 1951년 시 동인 '청포도'를 결성했다. 1953년「문예」지에 「경주를 지나며」가 추천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1965년 첫 시집「현장」을 낸 이후 2008년「고향의 소나무」까지 거의 매년 시집을 낼 정도로 왕성한 창작을 해왔다. 초기에는 향토색이 짙은 시를 썼으나 점차 현실성이 강해지면서 상징적 표현수법을 도입하고 있다.

 시집에「5월 나무」(1969),「나비와 분수」(1971),「오후의 한강」(1973),「보리고개」(1981),「산다는 것은」(1988),「물새의 꿈과 젊은 잉크로 쓴 편지」(1992),「옛날과 물푸레 나무」(1998),「사랑 3」(2003),「조가비 속에서 자라는 나무들」(2004),「음악이 열리는 나무」(2006) 등 39권의 시집을 낸 다작시인이다. 산문집으로「행복과 불행 사이」,·「모란꽃 한 잎을 너에게」,·「나의 서투른 인생론」(1999) 등 20여 권이 있다.

 시문학상(1965), 월탄문학상(1973), 대한민국문학상(1980), 한국기독교문학상(1982), 서울시문화상(1990), 보관문화훈장(1992),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6), 시와시학상 특별상(2008) 등을 수상했다. 2004년 5월 강원도 양양군 낙산도립공원 입구에「황금찬 시비」가 세워졌고 2007년 9월 경기도 남양주시 금남리 야외예술공연장에 시비「북한강문학비」가 세워졌다

 

9. 주요작품

 

 

촛불 !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국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 「촛불」 전문

 

 

 

 

보리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불랑은 유럽,

와스카라는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어의 보리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어의 보리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 「보리고개」전문

 

 

 

 

저녁노을 피는

하늘 가엔

먼 詞緣이 잠이 들고

 

들국花

山길엔

牧童만 내린다

 

瞻星臺 雁鴨池

돌아가는

나그네 봇짐에 어스름이 실리고

 

어디를 갔느냐

아득히 불러도

徐羅伐 千年 배 떠난 나루 !

- 「慶州를 지나면서」전문

 

 

 

 

이제는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城마루에서

접동새가 운다

 

사람은 가고

城터는 남아

無常함이 이리도

새삼스럽다

 

무너진 城틀 위에 푸른 이끼

서름이 남기고 간

슬픈 얘기여

 

다 가는 것이

城줄기 마자 갈아 앉으면

텅 빈 하늘 아래

저녁 놀만 타리라

 

낡은 城門에 기대서서

나도 갈 것을 생각하며본다

 

흐르는 江물

세월은 흐르는데

 

꽃처럼 피었다진

옛날을

접동새 운다

-「접동새」전문

 

  위 글은 시 전문계간지 시세계 2014년 봄호에 게재된 기획특집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