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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 이수화 편

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이수화  편



1.만남


  2015년 6월 24일 오후 2시 일찍 여름 날씨를 보이다가 비를 조금 뿌리면서 수그러진 오후였다. 5호선 공덕역에 이미 도착하셔서 기다리시던 이수화 선생님을 뵙고 팥빙수나 시원하게 드시자는 바람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찾은 호젓한 카페에 들어서자 대형 디지털 벽시계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오랜 인연이 만남을 편하게 만들었고 어떤 거북함도 없이 여쭙고 싶은 말씀에 대한 욕심을 내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으시면 놓으실 줄 모르시는 달변가셨고 수많은 관중들을 휘어잡는 진행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까이 지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호젓한 자리 하나 만들지 못한데 대한 불편함을 푸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홀가분한 자리였다. 

  

2.시 창작 동기, 연유


  1950년 6.25발발 3일 후 북한은 서울을 점령하고 12살 소년으로 적 치하 석 달을 지내면서 서울역 인근 염천교 위에 있다가 용산역 원자폭탄 폭격으로 잘못 알고 의식상 죽음을 경험했는데 육체적인 상처보다 더 깊었다. 그 후 평생을 지배했다. 봉래초등학교 남로당소년단 선생님들의 표변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도 평생을 같이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문학(시와 극작, 비평)에의 인문주의(휴머니티, 인간 불신, 죽음에 대한 반동)로 발전한 것이다.

  서울 수복 까지 경의선 소사 북초등학교 6학년을 반장도 하고 학예회 땐 아동극?앗 뜨거?일종의 폭소극(爆笑劇)에서 주인공도 하면서 부친이 철도공무원 신분이라 1.4후퇴 피란지에서도 전전긍긍한 1년을 보내야했다. 수복 후 공덕동 김구선생 효창묘지 길하나 건너 구 서울형무소 인방, 미당 서정주 선생님 댁과 김구선생님 유택 사이동네 신공덕동에서 아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학명문 중앙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때는 인촌 김성수 부통령이 서거하셔 교우들과 만장을 들고 장례행진을 했고 1949년 김구 선생님 국장 때도 한 위대한 인물의 죽음에 대한 영상이 저 염천교상의 원자폭탄 오인에 다른 죽음과 겹쳐진다. 소년의 의식 그대로 인간의 삶과 죽음, 위안들의 위대성에 대한 본능적인 비교의 비감, 그리고 중학교 신문반(桂苑旬報)에서 중앙고교 선배들과 문예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김동리 선생님을 초대하여「백막문예의 밤」을 열고 한동네에 중앙고의 대선배이신 서정주선생이 사시는 걸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한국일보 전국고교문예콩클」에서 1등으로 당선되었다. 이 상은 미당 선생님과 양주동박사의 심사였다. 이 때 당선한 장시「바람의 노래」는 그 뒤 1963년 현대문학(미당선생님의 추천) 문단데뷔작이 되었다. 추천완료작은 모창사비곡(募窓史悲曲) 역시 장시로 극찬을 받았다.

  김종길 선생님은 한국일보 월평에 모창사비곡(募窓史悲曲)을 신예 이수화가 역사의식의 날카로운 메스를 가했다고 극평해 이때부터 나의 시 향방을 굳혔고 미당 선생님의 기층 민족정서와 민족전통의식이 융합된 상태였다.

  부친께선 시인이 되었을 대 소회로?너는 효령대군 후예답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향년 62세에 작고하셨는데 중앙고교를 다닐 때나 지금이나 모교 건학년도와 부친의 생년이 같은 1908년에 대한 나만의 친연성을 느껴왔다.


3.나의 시론


  한국어와 한국시의 개척자인 정지용은「詩의 위의(威儀)」에서 詩를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壓伏)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詩의 위의(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않는다 했다. 그리고 소설 보다 선읍벽(善泣癖)이 있는 시는 독자 보다 먼저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고 했는데 미당과 정지용은 散文이 시에 버금간다.

  T. S 엘리엇 17세기 영국의 J. 안 일파의 형이상학파시(形而上學派詩)를 깊이 연구로 세기적인 현대시, 즉 주지주의시(主知主義詩) 대가가 된 연구 요소 중 한 가지가 이른 바 구어체언어(口語體言語)구사였다고 한다.?가서 떨어지는 별을 잡어라?(Go and catch a falling star)와 같이 구어(口語)와 구어체의 리듬이 J. 안이나 엘리엇의 詩 특징이다. 이 건 현대시의 혁명이었고, 앞으로 영구히 지속될 현대시의 숙명이라 생각된다.

  나는 이와 함께 J. 안의 컨시이트(Conceit, 奇想)활용과 레토릭(Rhetoric, 修辭學) 이 현대시 창작의 금과옥조로 꼽아 습관처럼 활용하고 있다. 특히 T. S 엘리엇의 사상과 감정의 융합된 감수성 미학 창출은 더 없이 귀한 시론의 핵심이며 엘리엇의 전통과 역사의식(歷史意識)문제는 나로서는 이미 데뷔작 중의 하나이며 대표작으로 꼽곤 하는 장시 모창사비곡(募窓史悲曲)에 골고루 반영되어 있다 하겠다. 즉 앞에 열거한 구어체, 컨시이트, 전통의식, 역사의식, 장시, 리듬 등등이디.


4.극작가


  1971년 KBS 신축연속극 공모에 당선 상금이 총각신셀 면하게 해주었고 1962년 국방부 「국군의 방송」건군 10주년 기념 연속드라마「압록강의 피가 마르기 전에」당선이후 본격 방송드라마 작가로 데뷔하는 당선작「아벨의 반항(反抗)」을 쓰게 되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연극, 희곡작가로 데뷔하는 것이 이진순 선생님이 창단한 극단「광장(廣場)」창단 멤버로 극단 정기공연「벚꽃동산」,「사춘기(思春期)」,「대추나무 뿔나다」등 기획자로 뛰면서「연극지」에 희곡「석화(石花)」를 발표하면서였다.

  이렇게 시, 희곡, 방송드라마의 1인 3역을 1962년부터 1995년 MBC TV「명시의 고향」을 끝낼 때 까지 30년을 넘게 주로 KBS 전속 작가생활을 지속하였다. 지금은 작가상도 꽤 있지만 그 30년간 상이란 1977년「방송작가 나무상」이란 걸 하나 받고, 한운사 회장시절 방송작가 회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주로 KBS 무대 극본집필은 방송드라마의 유럽쪽 영향으로 브레히트 이른바 문예드라마 실험 방송에 진력했고, KBS 아침다큐「어느 인생」이란 실화극은 황금찬 시인께서 주말마다 애청하시곤 곧장 전화를 걸어 찬사 섞인 청취소감을 피력하시곤 했다. 내가 TV드라마 까지 손을 댔던들 작고한 작가들처럼 일찍이 세상을 등졌을 지도 모른다. 

 

5.현대시인협회와 제 12차 세계시인대회


  1972년 한국일보 강당에서 한국현대시인협회가 창립되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께서 회장에 추대되었고 나중에 회장을 역임하신 문덕수 선생님, 나는 당시 사무국 간사였다. 그 후 사무국장, 상임이사, 부회장(故 이봉래 회장 때)임기를 마치고 한국문인협회 직선제 부이사장과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을 역임하는 바람에 회장직을 역임할 수 없었고 고문직을 맡으면서 실무진에서 떠난 지 10년이 넘었다.

  지금은 사단법인체가 되었지만 내가 사무국장을 맡았던 시절 회비 미납 원로회원께서는 연간 사화집에 작품을 찾아 동참하실 수 있도록 사무국장 전결처리 했지만 10여 년간 아무도 나서지 않아 사화집을 보면 옛날 원로회원 이름을 찾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1990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제 12차 세계시인대회는 정한모 대회장, 문덕수 집행위원장 아래 수석상임위원직을 맡아 각 쎅션별 시낭송은 물론 라마다 호텔 700명 수용의 컨벤션홀 가득히 언필칭 세계시인대회 시낭송대회를 단 이틀 만에 성사시킨 공로상을 수상했다.

  구상, 김광균, 설창수 원로시인들과 영국의 존 실킨, 러시아의 요셉 브로드스키, 예브게니 예프트셴코, 일본의 시라이시 카즈코 등 각국 퍼포먼스의 대가들이 시낭송의 세계적인 수준을 뽐냈던 것이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대회 마무리로 백서나 기념사진첩 하나 못 내고 말았으니 못내 아쉬운 일이다.,

  이 대회 전 1986년에서 2년간 문예진흥후원협의회(회장 박용학) 사무국장을 맡아 매일 광화문협회 사무국에서 성북동 김광균 부회장 댁으로 결재를 받으러 다니면서 많은 체험을 했다. 임원진, 이사진들의 사심 없는 처신이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인촌 김성수선생의 좌우명인 공선사후(公先私后)란 명언의 뜻 깊은 의미를 새겨야했다.


6.문인들의 위상제고와 독자 저변확대


  첫째는 문인 하나하나의 창작에 대한 책무다. 좋은 작품, 위대한 작품을 씀으로서 자연스럽게 문인에 대한 존경과 그 성과가 드높아진다. 한국문인이 노벨문학상이라도 탄다면 한국문인전체에 대한 가치는 하루아침에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것이다. 그 만큼 좋은 작품을 쓰는 일인데, 한국문인협회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두 단체부이사장을 역임한 입장에서 볼 때, 문인 숫자만 해도 1만5천이 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꾸준한 창작행위와 단체는 단체대로 작가, 시인들의 창작수준 향상을 위한 기획과 추진역량이 긴밀히 관여되어 있어서 꼭 필요하다.

  한국현대시(컨템퍼러라시) 출발 100년(1908년 육당 최남선의「해에게서 소년에게」)이 넘었는데도 대표적 단체들이 기껏 선거 때나 이 것 저 것 운위하지 그 많은 해외문학기행을 드나들면서 노벨문학상 시상 컨텍스트 견문 하나 다녀오지 않았다.

 

 둘째는 우리나라 문학인 신인 데뷔는 해방 후 부터 문제라는 것이다. 현대문학 1966년 6월호에「한국문학의 제문제」란 제목으로 가이드 좌담회를 개최했 다. 당대 문단의 조연현 사회, 곽종원, 김동리, 박두진, 박목월, 박영준, 백철, 서정주, 안수길, 이광래, 이원수, 정태용, 황순원이 대거 참석하여 한국문학의 절실성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

  주로 현실참여문학과 신인배출문제에 대한 찬반양론의 성격을 띤 논의였다. 참여문학은 참석자 모두가 반대의사를 폈고 이에 대칭적인 순수문학은 철학성을 강조하였다. 신인배출은 양적으로 많은 듯하고 데뷔한 신인들의 지속적 발전이 없다는 점. 신인들의 문학적 자질이 높아야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나 이제나 신인 진출, 소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참석 했던 당대 문단의 대표적 존재들은 전원 작고한 분들이다. 이분들이 염려한 신인배출기관의 문제점 암시는 그간 신춘문예에 공모한 신문사들 몇몇이 개폐를 단행했고 단편소설이 많다는 지적은 그간 중편, 장편소설의 양적발달을 보았다고 한국문단 50년의 산증인으로서 평가한다.

  과다한 신인등단 숫자, 철저하지 못한 신인데뷔 검증은 저분들 염려 보다 오늘의 현실이 더한 편이라 늘 씁쓸하기만 하다. 이것이 문인 위상을 저해하는 가장 적폐적인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는 독자들의 한국문학 이반현상은 전반적인 문학의 질의 제자리걸음과 심심찮게 발생하는 표절문제다. 최근의 신모씨 장편「전설」이 일본 미시마 유키오의「우국」이란 작품의 표절문제가 불거졌고, 문학상의 오래방법인 패러디(패스티쉬, 혼성모방)수법이라면서 북한 철학서의 일정부위를 낱말 하나 바꾸지 않고 베껴버린 이모작가의 표절시비는 우리 한국독자들 분노를 사고도 남는 사건이다. 이런 케이스가 한두 건이 아니어서 큰 문제적 독자이탈 현상인데 나는 오죽하면「한국문인명예운동본부」부회장직 까지 맡아본 일도 있었다.

  나는 6.25 동족상잔의 비극 와중에도 문인끼리 사감을 드러내 별난 적대의식이 돌출되었던 비화를 알고 있기에 인간의 사악함이 얼마나 위기상황에서 문인들 독자이반을 재촉하는지 크나큰 문제점을 절실히 경계하고 있는 바이다. 

   

7.시낭송 운영에 관한 체험


  구한말 1910년 일제에 구권을 약탈 다하고 6.25를 겪기까지 36년간 시낭송이란 서울에서 조차 저 경복궁 서쪽 인왕산 언저리나 서울의 황학정, 남선 계곡 같은 곳에서 국궁대회 때 가생 시창(漢詩唱)이 열린다든가, 시골 은둔 거사들이 산천유람 때의 한시창이 있곤 했으나 본격적인 한글시(신체시)낭송회는 1921년 5월「장미촌」동인(월탄 박종화, 공초 오상순, 박인덕, 황석우, 노자영)들이「장미촌」창간호 출간기념으로 서울 YMCA에서 시낭독회를 연 것이 한국시 최초의 시낭독회(詩朗讀會))다. 월탄회고록에서 청중은 5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저녁 7시, 한시의 절구(絶句와 4율(四律)만을 시라 하고 신시(新詩,자유시)는 일반 인사들의 안중에도 없던 대라 호기심에 찬 젊은 청년들, 대학생들, 갓 쓴 노인들까지 YMCA 강당에 가득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로 부터 내가 중앙고 3학년 문예부장을 할 때 중앙고가 5대사립(중앙고, 휘문고, 양종고, 배재고, 보성고)연합「문학의 밤」을 대표자가 되어 주최하였다. 1959년 새로 건립된 경복궁 서편 길 건너 진명여고 대강당에서 대대적인 시낭송회를 연 것이다. 당시 시낭송회(한글시/콘템퍼러리시)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신문기사도 전무했을 정도로 였으니 전국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 후 직접 시낭송회 단체를 창설하고 운영하게 된 것은 1997년 이원주식회사 후원으로 서울 인사동「사구비홀」에서「서울시낭송 클럽」시낭송 전문단체의 출발이다. 처음엔 1주일 마다, 다음엔 1개월 단위로, IMF로 후원이 중지되고 지금은 계절 단위로 또는 이벤트 별로 낭송회를 지속해오고 있다. 낭송 규모나 그 내용의 학술적 교육적 낭송 기예와 예술적 이론 자료와 경험이 축척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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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세계


  현대시가 걷는 지성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도가적(道家的) 시세계를 형성한다. 작금 외래풍조가 돌아와 이러쿵저러쿵 떠벌이는 와중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의 세계를 개척해내고 있다. 우리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들린다.

  혼돈과 환란 속에서 그의 세계는 평온과 안온을 찾게 한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독특한 ,융합을 통해 공감도를 끌어내는 그의 역량은 평가되고도 남는다. 현대시에서 그가 도가적 경지를 찾는 것은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서의 창조이다

  시인 박재능(朴栽陵)은「허무 제사지내기 허무 가지고 놀기의 도가시인 79편 연작시집」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시세계를 조명한 바 있다.

  또한「허무제(虛無祭)」직전시집,「그윽한 슬픔의 경전(經典)」자료에서 원로시인들께서는「어우동 염시ㆍ4」,「지하철 정거장에서」,「허사초」등이 마음을 끄는 중에?비구니금지장면초 연작은 깊은 충격과 더불어 흥을 돋운다?고 故 김규동 시인께서 평하셨다.

  크라시지즘에 서 있는 이수화 시인의 새로운 싯적 새 타이어와 유모아, 그리고 말의 솜씨는 일품……이라며 박태진 시인께서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듯한 상상력의 분방을 다스릴 방도는 무엇일까, 이수화 시인의 앞으로의 과제일 듯하다며 김종길 시인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수화시집「그윽한 슬픔의 경전(經典)」은 차례 제목만으로도 서슬이 푸른 단사(端士),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는 풍류객(風流客)의 면모가 약여(躍如)하다고 장호(章湖) 시인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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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이수화 약력


1940년 서울 만리동에서 출생. 서울봉래초등학교입학, 아현초등학교 졸업, 중앙중고등학교 졸업.「중앙백년사」편찬위원 역임, 고려대학교 문인회 시분과위원장 역임. 연세대 교육대학원 동창회 상임고문 역임. 경기개방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미국IAEU 명예 문학박사.

건군기념 연속방송극「압록강의 피가 마르기 전에」당선으로 국방부장관상 수상(1962). KBS1라디오로 방송. 60년 히트작 신봉승 작가의「두고온 산하」에 이어 빅히트를 침. 현대문학지로 데뷔,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 등재(1963).「붉은 백조」KBS1 라디오 연속극 방송(주월 한국군방송 겸용)(1964). 時事通信社 특집부 기자 역임. 한국방송회관 월간 방송 편집부장 역임. 극단?광장?기획위원,「연극」지에「석화」발표하며 극작가 데뷔(1966),「벚꽃 동산」,「사춘기」, 등 기획(주로 이진순 선생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공연)(1967), KBS신촌연속극「아벨의 반항」당선.(1971), KBS로 방송 영화화의 시나리오 각색. CBS 연속극 그대들의 천국, 새마을 주제 단막극 시리즈 150여 편 집필 방송(1973), KBS 연속극 「훈풍」등「KBS무대」50여 편 집필 방송. 방송극작가폅회 편집위원, 이사역임(한운사이사장)(1975-1977),월간 여원사편집부장, 편집부국장 역임(191974-1977) 방송극작가상 수상(1977), TV극 머나먼 귀로로 중앙일보ㆍ동양방송 사장상 수상(1980), 시나리오「피어린 귀향」으로 국방부장관상 수상(1981), 시나리오「대투혼」으로 국군영화제작소장상 수상(1982), 자유시인협회 상임부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역임, 현재 지도위원. 한국문학비평가협회 회장, 시낭송 동인「시와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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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요작품


바다



바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수만(數萬)톤의 햇살이 지느러미를 파닥인다.

마적(魔笛)소리로만 춤추는

푸른 수의(囚衣) 배암의 살갗으로

바다는 춤추는 바다는

피부(皮膚)마다 석유(石油) 비늘이 돋아난다.

가슴에 문질러 파꽃이 피던

죽은 해협(海峽)은 허옇게 이빨을 갈고,

간 봄 혼교(婚交) 때 박하(薄荷)네를 풍기던

흰 샅살에는 석유(石油) 비닐만 돋아나고 있다.

수만(數萬)톤의 햇살이 불타올라

마침내 처녀막(處女膜)을 상(傷)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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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금지장면초(禁止場面抄)



씬1.(타이틀 백)

머리가 파란 사미니(사미니)가 고사리를 딴다.

19세의 여승(女僧) 미옥(美玉)이다

호랑나비떼 날아와서 한 마리가

미옥의 콧잔등에 앉는다.

미옥(美玉),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들어 나빌 쫓는다.

날아가지 않는 호랑나비.

이번엔 다른 놈이 날아와

여승(女僧)의 푸른 머리 위에 내려 앉는다.

가만히 드러누워 보는 미옥(미옥)의 두 눈.

배음(배음)[여한(여한)테마의 여창(여창) 솔로]]C.I

되면서,

슬로우 모션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점점 화면(畵面)

가득히 손바닥을 펴 고사리를 내민다.

그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끌러내는 허리끈

다음 순간(瞬間), 탁! 그 허리끈이 고사리밭

어느 일전(一點)에 떨어지는 찰라(찰라),

한 마리의 꽃뱀으로 화신(화신)한다.

아, 그 아름다운 수유(須臾)(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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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제 2

- 나쇼몬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

나쇼몬(羅生門)에서

초적(草賊) 다쵸마루가

무사(武士)의 아내 마치코ㆍ교를

아주 낭만적으로

강간(强姦)토록 묘사한다.

결박당한 남편(男便) 목전(目前)에서

금잔디에 눕혀진 여인(女人)은

간(간)하는 초적(초적) 어깨의

힘살을 손톱으로 파고드는데,

최음제(催淫劑)처럼 쏟아져 내리는

햇빛은 눈부셔… 눈부셔…

여인(女人)의 눈가에 액체 같은 것이

천연스레 흘러나온다.

아, 보는 이들의 그 처참한

집단최음(集團催音)… 그리하여

극장(劇場) 안은 삽시간에

남녀의 호르몬, 아니…

나쇼몬(羅生門) 냄새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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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벌써 반세기나 된

내 나이 열두살

6.25 동란 때.

트럭 무개칸에 실려가는

GI들에게

전쟁고아(戰爭孤兒)들이,

츄잉검 하나 던져주질 않고

그 GI들 달려가노라면

헐벗은 팔둑을 고추세워

엿을 먹여대곤 했네.

아이들이 벌죽벌죽 웃으면서

?좃 빨아라, 새끼들아!?

- 하는 것이었으나,

GI들은 웃는 아이들이 그저

?잘 가요, 자유의 수호천사들이여!?

- 하는 줄만 알고서

그 후로는 저희들끼리

팔뚝을 옷소매 밖으로 뽑아들고는

서로 엿을 먹이며 낄낄대었다네.

아! 반백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GI들은 소파에 편히 누워

낄낄낄낄 우리한테 엿을 먹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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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매향리(埋香里),

바다 물 속에 향(香)을 담가 묻는 마을

매화향(梅花香) 물 갈피미디 풀리면은

미명(未明)속 고기떼의

도약(跳躍) 눈부셔라

…… 어느 순간,

바다 물 속에 폭발하는 훈련기의

오폭(誤爆) -.

이제는,

고기떼도 사람도

아, 서러워도 하지 말고 떠나가야 할 매향리(埋香里),

 

윗글은 시 전문 계간지 <시세계> 2015년 가을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