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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 성기조 편

한국문학사를 빛낸 인물들



성기조 시인 편



1,만남


  2015년 4월 7일 오후 4시 반에 서울시서대문구서소문로27번지 충정리시온 423호 계간 「문예운동」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한 성기조 선생님과 약속을 했다. 그 전 오후 3시에「왕십리문학회」동인지 발간을 위한 계약문제로 30분을 늦춰 양해를 구하게 되어 죄송한 마음 떨칠 수가 없었다. 만남은 건물 아래층에 카페서 이루어졌다.

  평소에 자주 뵈어야할 처지 임에도 실천을 하지 못함을 늘 마음에 부담으로 담고 있었기에 좋은 기회로 여겼던 터였다.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아주셨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수영장을 운영하실 만큼 적극적이셨다. 수영으로 건강을 다져 오신 선생님께서는 82세에도 불구하고 건강엔 아무 문제가 없으셨다. 국내라도 부산은 먼 거리로 손꼽지만 언제라도 일정을 거뜬히 소화하실 뿐만 아니라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내시면서 닦으신 인맥인 영국의 노벨상 수상자 6분의 초청을 받아놓으신 상태였다.

  시를 써오신지 60년이 넘으신 선생님은 스물다섯 권의 시집을 내셨다. 꽃과 사랑, 그리고 삶의 무게를 연달아 출간하신 것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세상을 보는 눈이 시에서 맴돌고 있다고 자부하셨다. 그로 인하여 시인은 죽을 때까지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 시창작 동기

 

  세상에 태어나 열 살 쯤 살기까지 무척 호기심이 많아 눈동자를 고정시켜 놓을 수가 없었다. 진사 벼슬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일 년에 한 두 번씩 사랑채에서 많은 손님을 모시고 즐기는 것을 보았다.

  뒷날 알게 되었는데 그게 詩會였다. 제목을 정하고 그 제목으로 시를 지어 장원을 뽑고 잘된 작품을 골라 돌려가며 읽으며 즐기는 일을 보고 그 때부터 시가 좋아졌다. 17-18세가 되어 할아버지처럼 시인이 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문학 공부에 열중했다.

  고등학교 때 문학을 하는 친구들이 모여「버중나무」란 시집을 발간했고 또한 1954년 4월「도향(稻鄕)」이란 동인지도 발간했다. 6•25 사변 때문에 피난 다니던 시절, 생명을 부지하는데도 바쁜데 시를 생각하며 피난 다녔다는 말을 듣자니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발표매체가 없던 시절,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동인지에 참여자도 많았다. 세상을 떠난 고 구경서 시인도 있었고 극작가이며 서사 시인으로 활동하는 하유상 작가도 함께 했다. 1953년 7월 대전 미국공보원 전시실에서 시화전을 열었고 1958년 4월에 동인지「詩와 詩論」, (현재「문예운동」)을 한무학, 최인희, 석용원, 이성교, 김관식 등과 주간으로 발간했다. 1959년에 한국자유문학자협회와 국제P•E•N 클럽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되했다. 1971년 2월에 김종문, 문덕수 등과 한국현대시인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에 선임된 것이 본격적인 문단활동의 시발점이 된 셈이었다.


 3.시에 영향을 미친 스승

 

 제일 큰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 청마 유치환이었다. 작품으로 영향을 받은 시인들은 많았다. 김소월, 정지용 시인과 청록파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시인, 그리고 서정주 시인과는 여러 번 지방 강연도 동행했고 한 때 자주 찾아가는 시인이기도 했다.

 1970년 대 이후에는 모윤숙, 김동리 등과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어 그분들은 손대기 싫지만 꼭 있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을 챙기는 데 앞장서서 해결사 구실을 많이 하다 보니 인간적인 관계로 까지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侍奉시봉, 지극정성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두 분이 모두 한국문단의 어른이었고 이십년 가깝게 나이들이 많았으니 어버이 모시듯 지극정성으로 모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동차도 흔치 않았으니 원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워했겠는가 짐작이 갔다. 70년 대만해도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어려웠을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모두 원만하게 일이 해결해드렸기에 나이 많은 다른 문인들은 부러워하기도 했단다.

 

4.모윤숙, 김동리, 정주영 회장 등과의 만남

 

  모윤숙, 김동리 선생 두 분이 모두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어서 일을 꾸미고 벌려 푸짐하게는 아니더라도 가난한 문인들에게 잔치라도 하려고 세미나 등 큰 모임을 십여 명에 이르는 작은 모임까지도 자주 열어 그 비용을 만드는 심부름을 도맡았다. 재벌이나 돈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개를 만나라고 하면 찾아가 행사나 모임의 성격을 설명하고 비용을 받아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끔 그 분들이 약속을 안 지키는 바람에 성기조 시인, 자신의 주머니를 꽤 많이 털기도 했다.

  1978년 가을에 현대 고 정주영 회장이 문인들 2백 여 명을 울산 현대조선소에 초청했던 일은 참가했던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사건이었다. 엄청난 시설과 천문학적인 숫자가 왔다 갔다 하는 금전거래, 그리고 발전된 조선기술 등, 그야말로 한국을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을 눈여겨 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많은 회원들이 참가했다. 그 때 정주영 회장의 환대는 대단했다. 현대뿐만 아니라 지금은 해체된 명성그룹과 경제인연합회 등 이들과 소통하고, 경비를 만드는 일은 모두 성기조 시인의 몫이었다.

  또한 1971년에 최인욱 (소설가), 김영일 (아동문학가) 등과 함께 만든 ‘백인문학회’, 그해에 조연현, 문덕수, 이추림 등과 함께 창간하여 지금까지 건재한「詩文學」, 김동리, 유주현, 정을병 등과 함께 만든 ‘한국소설가협회’ 에 운영분과 위원장 및 중앙상임위원을 맡아 창립했고, 한국펜클럽의 부회장으로 당선(1977년) 되는 영광을 얻었다. 정말 빠른 문학적 출세였지만 이것들은 문단적인 일이고 문학작품에 관해서는 무관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5.김동리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에 거론된 일과 보람

 

  이시기에 특히 문학적 스승이었던 유치환 선생을 기리는 청마문학회를 조직해서 부회장을 맡았던 일이나 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월간문학」이 아주 어려워 스스로 폐간 위기에 놓였을 때 당시 한국문인협회 조연현 이사장의 청에 못 이겨 운영위원을 맡아 지속적으로 발간할 수 있게 만든 일, 그리고 1978년에 한국문학작품의 번역출간을 위하여 국내 최초로 재단법인체로 한국문학진흥재단을 설립해서 정부의 허가를 받은 일을 꼽았다.

  국가의 지원으로 최초로 본격적인 문학작품의 번역사업이 이루어졌고 김동리의「을화」 (영역),「사반의 십자가」(불역), 박종화의「세종대왕」(영역), 모윤숙의「렌의 애가」(영역)를 시작으로 80여 권의 작품이 번역되어 외국으로 날개를 단것처럼 퍼져나갔다.

  이 중 김동리의 작품이 노벨문학상 심사를 맡은 일부 위원들의 눈에 들어 작가의 프로필과 문학적 업적에 대한 보충서류 제출을 요청받아 한 때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기대감에 찼을 때 국내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당시 나라에서 성기조 시인께 일을 맡겨 “당장 스웨덴으로 가서 나라를 위하여 로비를 하라”는 말을 듣고 “스웨덴 가는 것은 문제없으나 그렇게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작가의 이미지를 망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한국문인협회의 납북작가 대책위원으로 일하면서 그렇게 좋아하던 정지용 시인을 1983년 해금되도록 노력했고 그 성과로 정지용 시인이 최초로 해금시인이 되어 작품이 당당히 보급되어 독자들을 만나게 되고 자유롭게 출간될 수 있게 되었을 때를 제일 기뻤던 일로 기억되었다. 또한 MBC TV '인물중계탑‘에 성기조 시인의 작품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한 시간을 내어서 방영해 주었는데 이는 당시로서 놀랄만한 일이었다.

 

 

6.시론

 

 시론은 참으로 다양하여 쓰는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特長이 있다. 그러면서「論語」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小子 何莫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너희들은 어찌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감흥을 일으키며 인정을 관찰케 하며 사람과 어울리게 하며 非情을 원망할 줄 알게 한다. 가까이는 어버이의 섬김을 가르치고 나아가서는 임금 섬기는 바탕이 되며 새와 짐승과 草木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다. 이 이상의 시론을 나는 아직 본 적 없다고 말했다. 공자는 시의 효용론을 펴면서도 현대적 감각과 생활조건에 인색하지 않았다. 시를 읽으면 원망할 줄도 알고 효와 충성도 알게 된다.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기는 데도 도움이 된다. 시인은 악한 일을 못한다. 또한 시를 배우면 새와 짐승과도 친하게 된다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말한 공자는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시로서 일어나서 예로써 서며 음악으로 완성한다) 라고 말했다.

 

7.취미 생활

 

  학교 다닐 때는 테니스에 빠져 그 재미로 아버지께 무척 혼났다. 그 뒤로는 70년 대 낚시에 미쳐 일주일에 두 번은 꼭 갔다. 함께 갔던 분이 백철(평론가. 당시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박연희 (소설가) 등이었고 그 밖에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렸다. 낚시터는 주로 두 시간 안팎이 걸리는 곳으로 평택수로, 송악 저수지, 당진과 서산 지역에 있는 큰 웅덩이나 저수지였다.

  백철 선생과 함께 서산으로 밤낚시를 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반나절을 고생한 일을 지금도 잊지 못했다. 희부연 새벽에 경찰이 달려들어 검문을 하고는 다짜고짜 지서로 연행을 당했다. 연행한 뒤,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반나절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무슨 할 일이 없어 밤새도록 낚시질이냐. 이북 어디서 지령을 받고 왔느냐” 고 되묻고 또 되물을 때는 기가 막혔다고 했다. 밤새워 낚시하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동네 사람들이 간첩이라고 신고했기 때문이었다.

송악 저수지에서의 밤낚시는 졸음에 대비해서 허리를 굵은 줄로 동여서 소나무에 묶어 굴러 떨어지지 않게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낚시 중에 졸다가 굴러서 물속으로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단히 준비하고 밤을 새운 때도 있었다고 한다. 낚시하는 날은 새벽 네 시에 한남동 단국대학에서 한강으로 가는 길 끝에 있는 낚시가게에서 만나서 출발하였는데 그때 묵묵히 운전해주는 운전수가 무척 고마웠단다.

 그 이후로는 수영에 재미를 붙여 서울 사직동과 장충동에 수영장을 짓고 서울시와 민자 사업으로 경영했다. 수입도 짭짤했기에 재미도 있었다고 했다. 이 소문이 문단에 퍼져 지방에서 올라오는 문인들, 그리고 통행금지에 걸려 유치장에서 밤을 새우게 된 글쟁이들이 성기조 시인의 이름을 대고 문인이라고 하면 성기조 시인에게 확인하는 일이 하룻밤에도 몇 번씩 있었다고 한다.  연락을 받을 때 마다 경찰서에 가서 그들을 빼내 와야 했기에 나중에는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두꺼운 책「문예사전」을 사다주고 이 사전에 나와 있는 사진이 있는 사람만 데리러 갈 테니 골라서 알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단다..

 

 

8.시세계

 

  “성기조 시인의 문학세계를 아우르는 전반적인 시정신은 동양정신 특히 한국적인 시 정신에 입각한 텍스트의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적인 전통성은 유교적인 성장과정과 환경 그리고 여러 가지 자양분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첫째, 동양적 미학의 서정적 세계를 다양한 표현 방식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자연과 자아의 일체화는 한국 혹은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어지는 시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자아 인식의 원리가 주요하게 작용하면서 서경과 서정의 적절한 조화를 구축한다. 서정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인 미의식은 관조적인 미학의 수용을 통해 하나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미의식의 다양성은 성기조 시의 주요한 시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둘째,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현실 체험의 변용체계를 시에 수용하는 방식으로 도시 주변에 존재하는 민중의 모습은 대다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 살아가는 서민의 모습을 통해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시가 지녀야 하는 현실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을 적절히 드러내기 위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도시 주변에 존재하는 서민의 실상은 날로 심각해져 가는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의 한 부분을 상세히 드러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다문화 가정과 농촌의 실상은 날로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 농촌의 불합리한 구조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내면서 부조리한 현실의 비판적 형상화를 통해 민중이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제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상황이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식은 전쟁이 가져다 준 비극적 사건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함으로써 전쟁이 가져다 준 현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해하고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를 시를 통해 제시하고자 했다.

  셋째, 날로 심각해져 가는 환경과 생태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일이다. 현대 문명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하루가 다르게 편안한 삶의 방식으로 전환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본다면 그러한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동물과 환경은 서서히 파괴되고 있다. 그 중에 인간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는 환경의 문제는 중요한 하나의 요건으로 작용한다. 시대적인 요청이라 할 수 있는 환경의 문제에 대한 고찰은 녹색문화의 상상력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생태학적인 문제를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 것이 현대시의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시에서 과학문명이 지니고 있는 병폐가 어떠한 것인지와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에 대하여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이같은 문제는 시의 표현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인 주제의식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이며 평론가인 신라대학교 양혜경 교수는 저술한「청하 성기조 시 연구」를 통해 성기조의 시세계는 다양한 방식의 원용과 발전을 통해 한국문학이 추구하는 서정과 현실 반영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21세기 현대문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리고 한국 시문학의 전통적인 방향성을 현대로 계승하면서 문학사적 특성을 올바르게 규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9.가까이 지내는 친구와 아끼는 제자

 

 친구가 참 많이 있다. 그러나 꼭 누구라고 지목하기는 어렵다. 잘못 지목했다가는 큰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꼭 나와 함께 죽기라도 할 만큼 가까운 친구가 있겠는가. 생전에 자주 만나고 마음 상하지 않게 서로 배려하는 친구, 자주 만나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 가까운 친구가 될 것이다. 그 까닭은 죽어도 나 혼자요 살아도 최종 책임은 나 혼자 지는 게 아닌가

  아끼는 제자가 누구일까? 무척 오래 생각하던 성기조 시인은 한참 숨을 고르더니 ‘가까운 친구’를 밝히지 않듯. “글쎄”라고만 대답했다. 더 묻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이름을 밝히면 그 이름에 끼지 못한 사람은 섭섭해 할 것 같아 입을 다물겠단다.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더 물을 수 없었다. ‘성질이 고약한 제자가 있긴 하지만 참겠다’고 말하면서 허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말도 참으로 어렵게 나왔다.

             

10.성기조 약력


*시인, 작가,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문학박사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및 명예회장 역임, 예총 사무총장 및 예총 수석부회장 역임,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상임위원, 한국비평문학회 회장, 청람어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 중국낙양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현재 한국문학진흥재단 이사장,「문예운동」과「수필시대」발행인

*저서 : 시집「별이 뜬 대낮」등 25권과「청하 성기조 시선집(전 4권)」이 있고, 창작집 「모독」외 12권, 수필집「세상얘기」외 17권과「성기조 수필전집(전 3권)」이 있으며, 문예비평서「한국문학과 전통논의」와 고등학교「작문」및「문학」교과서 등 저, 편서 130여 권이 있음

*중학교「생활국어」와 고등학교「작문」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됨

*작품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 출판되어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자유중국문학상, 아시아문학상, 제 44회 한국문학상, 제 24회 국제펜문학상, 예술인대상, 제 21회 상화시인상, 원종린문학상, 흑구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한국예술인 큰 스승으로 추대되었음 


11.주요 작품

 

1. 꽃밭의 受難수난

 

 

푸른 산을 넘으면 보랏빛 산. 산을 넘으면 자주빛 水墨수묵빛, 산위에 구름이――구름은 江위에 들에, 鳶처럼 꼭두선이 가오리 네눈박이 鳶처럼 떠가야 하는가.

 

오랑케 꽃, 미음들레. 미음들레 들국화.

나생이 장다리꽃밭에, 해바라기 같은 正義정의가 돌돌 쇠소리를 내며 구르고, 북과 나팔과 활 대신, 불과 쇠와 火藥화약과 爆音폭음이 이리떼 걸음처럼 지나면, 新羅신라도 花郞화랑도 高句麗고구려도 薩水살수도 黃山황산도 되살아 핏줄에 가슴에 後裔후예로운 꽃. 활활 불붙는 꽃이 됨을 아는가.

떠나야 하리…… 봇짐을 지고, 아들을 딸을, 어머니를 손자를 업고 이끌고 물을 건느면 山. 山을 넘으면 溪谷계곡에서 다리쉼하며 별에 점치든 희부연 밤이 몇날이나 되었는지――

 

가파른 벼랑에 나무, 나무는 살고. 입김이 꽁꽁 어는 밤에 兵法병법도 총질도 서투른 손에, 산에서 들에서 굴에서 한치도 한줌도 안뺐기는 흙에 碑石비석이 되기를 얼마나 願했는가.

 

가시줄을 매고 담을 쌓고 땅속에 묻은 불씨를 밟으며, 鐵片철편과 火光화광이 冲天충천하는 땅위에 黙黙묵묵히 다물은 한송이 들꽃이 되어서야 쓰는가.

 

비들기, 비들기. 들에 산에 파아란 하늘에――구구구 맑은 하늘에, 물에, 구름에, 별에 달에 울어 울고.

 

주리고 고프고 찌들려 가난도 힘께 살아 가야지, 가슴에 피에 뼈에 내 땅에 환한 환한 꽃술이 내리도록 꼭 감은 눈. 눈을 뜨지 않고 땀, 방울 맺힌 땀을 쥐고 살아야 하리――.

 

 

 

2. 因緣說인연설

 

 

어둠이 밀려올 때

눈이 사락사락 내릴 때

바람이 불어올 때

매서운 추위가 몰려올 때

木花목화같은 다사로움으로

바위 같은 沈黙침묵으로

풀꽃같은 香氣향기

무르익은 果肉과육으로

開化개화하는 꽃잎의 부드러운

눈짓으로

눈 오는 밤 당신이

내게 들려주는

사랑의 말씀

 

3. 흙……16

-꽃밭

 

빨간 장미가 피었다

하이얀 장미가

아침 이슬을 머금고 피었다

 

노오란 장미는 햇볕을 받으려고

하늘에 목을 간들거리고

분홍빛 장미는 黃昏황혼을 찾아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

 

라일락이 향기를 감추고

무성한 잎이 피어나면

花園화원은 갑자기 쓸쓸해진다

 

永郞영랑의 모란도

素月소월의 진달래도

이제는 저버리고

가녀린 蘭草난초

꽃을 드리운 아침

 

이슬은 영롱하게

잎에 매달려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나에게 선사한다

 

보리 누름에

종달이 노래

一年草일년초가 목이 말라

비를 기다리면

하늘에는

구름이 떠가고

비는 꽃을 피게 하려고

질금질금 내리고 있었다

 

백일홍이 피고

채송화가 피고

금잔화꽃이 무리져 피면

나팔꽃은 아침을 알리려고

담위에서

뚜뚜뚜 나팔을 붙었다.

 

 

4. 풀밭에서

 

 

나는 풀들을 사랑한다.

풀이 풀과 더불어 푸르게 살아가듯이

나는 풀밭에서 풀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풀은 구름과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바람과 이야기하다가

잠시 몸을 피하듯 바람에 흔들려

다른 풀들을 손짓한다.

 

풀은 달 밤이 좋아 달을 불러

영롱한 이슬을 머리에 이고

반짝이는 달 빛을 나에게 선사한다.

 

나는 풀들을 사랑한다.

별이 빛나는 밤

바람에 밀려서 풀들은 가지런히 누워

흔들리다가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서는 풀들을 사랑한다.

 

밟혀도 죽어지지 않고

꺾여도 절룸대지 않는

풀들을 나는 사랑한다.

 

 

 

5. 풋콩을 까며

 

 

붉게 익는 감이 파아란 하늘에

보석처럼 박혔고

구름 한 떼가 감나무 위로 몰려 올 때

채마 밭머리에서

콩을 꺾어 풋콩을 깐다

 

지난 4월에 어머니가 심으신 콩

 

이 콩을 심으신 어머니는 병원에 가셨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여물지 않은 콩깍지를 비틀면서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은

콩대가 꼭 수척한 어머니의 손마디와 닮았기 때문이다

 

세상 슬픔을 가슴에 묻고 입 다물듯

콩씨를 땅에 묻고 말 없으시던 어머니

콩을 심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땅속의 콩씨 한 알에 생명을 느끼시고

환한 삶을 꿈꾸셨을게다

 

위 내용은 시 전문 계간지 시세계 2015년 여름호에 기획특집으로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