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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산첵-수필

엄홍도와 나 - 채수원

                                                                                 엄홍도와 나

                                                             

                                                                                                                                           숸 채수원(시인, 수필가)

  단종의 시신이 강가에 버려졌다. 이를 거두면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어명을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형제 친인척 등 피붙이들까지도 피로 물들인 무자비한 숙청을 하였다. 단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아내 정순왕후는 관의 노비가 되었고 자신은 유배지 영월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는 싸늘한 동강에 내 팽개쳐졌다.

  양심이라는 속병을 앓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권력 앞에서는 모두 무기력했다. 영월 하급관리였던 엄홍도 만이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그리고 그는 가족과 함께 잠적했다.

  용배가 한 산골에서 투병을 하며 마지막 생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외국에서 들었다. 귀국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 그에게 마음에 빚이 남아있어 소주라도 한잔 하며 용서를 빌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약속한 날짜를 보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더 이상 빚을 갚을 길이 없게 되었다.

  대학생이 된 시절 한국은 중진국 진입의 푸른 꿈을 가지고 있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도 어쩔 수 없다는 대통령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믿었다. 가난이란 게으름의 소산일 뿐이다. 누구나 노력만 하면 잘살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나만 열심히 하면 그 대가는 돌아온다. 각자가 최선을 다 할 때 우리는 선진화되고 이것이 애국의 길이라고 했다.

  한 기독교 단체에서 주관하는 약한 자를 위한 봉사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내 주변에는 흔한 게 대학 출신이었다. 일류 대학이냐 아니냐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은 10%에게만 주워지는 특권이라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회란 종잇장처럼 얇았다. 얼굴과 말만 비슷할 뿐 소망도 생각하는 방법도 살아가는 길도 차이가 많았다.

  우리는 좋은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에 취직을 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일생을 보내고 싶어 한다. 거기에 경제적 풍요함을 더 한다면 금상첨화다. 이것은 가진 자의 논리였다. 그 틈에는 가난 실패 멸시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은 없었다.

  사회에는 노력을 해도 넘을 수 없는 사회 구조의 모순이 있었다. 내가 내 돈으로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는데도 열 명의 배고픈 사람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 때까지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사회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많은 희생자가 왜 있을 수밖에 없는지 알아갔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리에게 주워진 특권은 약한 자를 위해 써야한다는 사명감도 필요했다.

  이를 위하여 과거에는 관심 밖에 있던 사회문제를 공부하고 체험하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용배를 만났다. 한국의 일류 대학이란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회계층을 뛰어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용배도 그랬다. 가난한 집 출신인 그는 자신을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했다. 출신 배경은 틀렸지만 약자를 위해 일하자는 공통점이 있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야학 개설과 농촌의 문제를 위한 농촌봉사에도 참여했다. 이를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