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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한국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 장윤우 편

한국 문학사를 빛낸 시인들

 

장윤우 편





 


1.만남

 

20161026일 오후 2시 양천구 목동 파리공원, 장윤우 시인님의 금속공예작품금수강산이 설치된 자리 앞에 벤치에서 뵙기로 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젊으신 형님처럼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단 선배님으로, 5호선 오목교역을 나와 10여분을 걸어 도착하였을 땐 셀카봉을 만지시며 필자를 반겨주셨다.

오랫동안 문인산악회를 매주 이끌어 오시면서 벌써 1470회가 넘는 모임의 터전을 마련하시다보니 건강을 다지시는 건 물론, 미술과 문학 분야에 활동을 부지런히 하시는 원동력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생기면 마다하지 않으시고 뜻을 함께 하시는 모습을 뵌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항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월간문학세계와 계간시세계의 변함없는 열정을 늘 고맙게 여긴다고 하셨다. 필자는 최근근황에 대한 말씀을 듣고 53년 문단 생활을 들려주시기 좋은 인근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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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 창작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나는 1950년 북한군의 남침(南侵)으로 10대의 나이에 참혹한 전쟁과 무자비한 파괴, 동족살상을 목격하며 남으로 피난길에 올라서 부친이 여수세관에 근무 하셨기에 항도 부산을 거쳐 남녘 다도해 여수항에서 중학교 3년간을 보냈다.

사춘기(思春期)에 푸른 바다와 외로이 떠다니는 구름 갈매기를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글을 썼다. 누구의 주목이나 바른 지도도 받지 못하였으나 책은 읽고 싶어서 골목안 고()서점 등에서 뒤적거리며 찾아 선체로 읽고 답답한 가슴을 달래였다.

전쟁이 원치 않는 휴전으로 끝나고 부서진 한강철교를 건너서 서울 영천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아무것도 없는 서울 거리와 행방이 묘연한 어린친구들을 그리며 꿈틀거리는 작문(作文)과 묘사(描寫)는 체질이었던가 보다.

서울중.고교시절(1950) 조병화, 황순원,,안병욱 교사의 지도를 받아 문예반활동을 하며 위대한 문호를 꿈꿨지만 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춥고 배고프다는 정설 탓에 은사와 상의 끝에 미술대지원으로 선회하여 서울대학교 미술대 응용미술과에 입학하였으나 꿈을 저버릴 수 없어 196311일 서울신문사 신춘문예 응모한 시,겨울동양화,전설을 고발하는 자2편이 당선(심사위원 : 서정주시인)되여 문단의 일원으로 들어섰음에도 세월은 무미(無味)하게 흘려보냈다.

1965년 첫 시집으로겨울동양화장윤우 시화(詩畵)집을 펴내자 문단에서 특히 선배 시인들이 한 가지라도 잘 해야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제대로 잡겠느냐고 힐난을 받기도하여선지 문학 분야에서는 미술을, 미술 분야에서는 문학 운운을 자제하여?혹시 그 장윤우가 맞느냐?고 놀라는 모습도 오래 들어온 터였다.

해를 거듭하면서 문화예술풍토가 전혀 새로운 풍조(風潮)나 표현형식으로 달라지며 융합. 퓨전 등의 대학교과가 확대되면서 공모전양상이 날로 새로운 분야로만 인기가 높아져가고 있었기에 전혀 이상할 게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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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로 찾았던 추억의 장소가 있으시다면?

 

남달리 방랑벽이 있어서 전국 방방곳곳을 방학기간에 혼자 여행하며 작가적 소재와 체험을 즐겼고 그 보헤미안 성격은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서울에서 1956년에서 62년까지 6년동안 명동일대 음악감상실돌체,청동다방, 은성대포집, 종로1가 화신백화점 뒷골목복지다방,전원다방, 그곳에 모여서 신춘문예당선 청년작가들이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서 동인지신춘시(新春詩)를 계간으로 발행 19집까지 이어가면서 자주 모여서 기성시단과 문예잡지들을 대항(?)해왔다.

개인시화전을 아마 나처럼 많이 자작시화로 갖은 작가도 없을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인천, 안양, 춘천, 강릉, 속초, 대전, 대구, 부산, 마산, 통영, 삼천포, 전주, 광주, 목포, 그리고 바다를 건너서 제주, 서귀포에서 그 위에 일본으로 현해탄을 건너서 동경의 아카사카미스케의 뉴재팬 호텔(1972,7전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Art Gallery. Gallery Scope)2회 가졌다. 무모하리만치 집요하게 100회를 목표로 가져온 이단(異端)자이다. 모두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시간,장소이며 지금 무얼 하는지 친절했던 현지, 이국의 문우들이 그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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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취미생활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고독과 독서라면 모두 웃음거리가 될 것이나 나는 유달리 빈 공간을 사랑했다, 황폐한 고장에 볼 것도 갈 곳도 별로 없던 도시 안에서 아무도 다니지 않는 뒷골목을 사랑했고 재래시장을 찾아 돌아보기를 즐겨해 왔다, 서대문 교북동의 빈사무실에서 밤새워 열띤 토론과, 간혹 외화 영화관을 찾아서 문영극장,우미관,천도교 강당, 동경(憧憬)의 외국풍물과 문화,영화인들에 젖어 그 취미는 팔순인 지금도 변치 않는다.

친하게 지내던 동갑내기 고()김영태시인도 밝은 해를 피하여 늘 혜화동 사무실에서 골목길로 오가면서 무용평론가로 펜 스케치화로 남긴 적잖은 문인들의 인물소묘, 작품자체도 쓸쓸하며 지금도 나를 그려준 얼굴을 살필 때마다 마음한구석이 찡해진다.

또한 술을 즐기는 건 자타(自他)가 공인한다. 지금도 거의 매일, 주로 막걸리를 문우, 화우들과 마시며 소통의 시간을 나누고 밤길을 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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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까이 지내셨던 친구 분들이나 제자들은 누구였습니까?

 

문우들은 주로신춘시(新春詩)동인이던 신세훈, 박이도, 이근배, ()강인섭, ()권일송, ()윤삼하, ()조태일, ()김종철, ()이가림, ()이탄, ()황명, ()박봉우, 채규판, 권오운, ()박정만, 강희근(,문협부이사장), 윤주영, ()유경환, 들이니 유명(幽明)을 달리한 지인들이 많다,

전국의 대학교에서 배운 제자들은 대학전공이 미술이기에 예컨대 미술관련 석,박사들만 50년 동안에 500여명은 된다, 마광수가 스스로 제자임을 자랑하며 신문사 신춘문예, 각종 문예지를 통해서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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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독자들(또는 동인들)과 가까이 했던 기억이 있으시다면?

 

박목월시인의 해변시인학교가 매년 개최된 안면도, 포항, 강릉 등지에서 배우고 같이 뒹굴던 독자들과 문우들이 모두 그립다, 목월의심상,목월 시인회출신 혹은 후배제자들과의 인연을 잊지 못한다.

1960대 이후 사회전반이 그랬지만 특히 문단이 빈궁하여 춥고 시공간의 마련자체가 힘들었다, 명동의설파음악실카페공간에 정례적으로 모여토요일오후와 시동인모임을 오래 지속한 것은 스스로 문학의 황제(皇帝)를 자처하면서 어지럽고 황폐한 지역의 해방과 구원을 할 사람은 문인들뿐이라고 주장하여왔다. 지금도 변함없는 지론(持論)이다. 신세훈, 유경환, 허유, 이준영, 정공채, 김종원, 정득복들이 동인이여서 김광균, 미당서정주, 추송웅등의 예술가들이 즐겨 초청에 응해주셨다. 당시 모여 동인을 꾸민 박영대는 훗날 시인이 되여 요즘도 함께한국문인산악회회원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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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문학활동 외에 관심을 가지셨던 활동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

 

언급한대로 문학에서 미술로 방향전환을 한 게 내 생애의 변곡점(變曲點)이다. 굶지 않으려는 방편으로 195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로 진학하여 재학 중에 육군 복무하고 졸업 후 바로 교직(敎職)의 길을 밟아왔다, 대학원을 마치면서 중,고교 교사(대광중,경기공고,청량공고)를 거쳐 경기공업대(현재 산업대),성신여자사범대 미술교육과에 (1970~2003) 40년 이상 봉직하여 대학원장, 박물관장, 산업미술연구소장등을 역임하였다.

기간 중에 서울대 대학원, 건국대, 고려대, 숙명여대, 성대, 한대, 한성대 등과 청주대, 원광대, 대학원에서도 후학을 양성하였다. 부지런히 뛰며 미술의 산업화를 목표로 정부산하기관 문광부 ()한국공예문화디자인진흥원이사장. 감사원 감사자문위원과 기능올림픽 출제 및 심사위원(11966) 노동청기능검정위원, 교통부 관광정책자문위원, 교육부 교과과정심의위원, 서울시 예술위원, 문예진흥원 미술분야, 문학지원심의위원들을 두루 역임해왔었다, 실로 50여 년을 정신없이 뛰어온 셈이다.

더 붙여 부언(附言)한다면 미술대전 및 각종 공모대전, 산업디자인 심사위원장을 오래 역임하고 한국미술협회에서도 부이사장 감사를 거쳐 현재 고문으로 있다. 따라서 일부 작가들은 우리를 문단정치꾼이라고 힐난하기도 한다.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과 부이사장, 월간문학발행인(6년역임) 현재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국제 PEN도 고문으로 있기에 붙인 말이다.

1년간 미국 로스엔젤레스 교환교수(1992~1963)로 체류하며 재미작가교류(재미시인, 문학제 낭송및 시화전 행사교류등)를 시도했고, 한국문인산악회를 결성하여 문덕수, 함동선 고()원영동,정득복,이창년,엄한정,김운향,등이 20년이상을 매주 산행하며 문학기행문학집발간, 봉사등을 펼친다. 따라서 한국문인협회(조연현이사장), 헌법재판소장(초청전에 대한-), 월간 시전문지현대시학100회연재_),감사패와 서울시문화상(1992), 예총예술문화대상등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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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선생님의 시론에 대하여 한마디 해주십시오,

 

철저하게 모든 문예가 한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여 예술의 본질(本質Originality)은 같다 다만 표현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음율(音律)로 표현하면 음악, 색채로 표현하면 회화(繪畵), 문자로 하면 문학, 물질(괴체塊體 Mass)로 표현되면 조각, 공예, 도예가 되는 것이기에 비디오 아트, 보디 페인팅, 설치 미술 등 앞으로 알파고 시대에 어떤 예술분야가 더 탄생되려는지 모를 급변시대이다.

금년도 노벨 문학상이 가수 밥 딜런(Bob Dylan)에게 돌아가자 굉장한 파문이 일었다, 쟁쟁한 작가와 전례를 무시하고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단 한권의 저서밖에 없는딴따라쟁이는 너무 나간 행위라고 한다만 또 다른 일면에서는 예술행위의 개념 확대이며 그야말로 마이크 앞 육성으로 평생을 걸어온 행위 예술가이며 시인으로서 좋은 선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연예 엔터테인먼트, 매체 언론 등에서 난리가 벌어지는데도 정작 밥 딜런은 한마디의 언급도 없어서 수상거부라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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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선생님의 문학 활동을 돌아보신다면?

 

1963년 이전에는 전국에 퍼져있는 고교, 대학교 문학도들과 교류하면서 을 키워 유경환, 구석봉, 김종원과 함께 지냈다. 언젠가는 문단의 구심체가 되기를 굳게 약속하였다.

나는 1956년도 서울고교 학생시절에사인부락이란 학생시집을 발간했다 학생시단 초유의 일이었다. 주변의 동년배뿐만 아니라 전국의 고교 문학도들과 쉬지 않고 교우관계를 넓혀갔다, 대학과 군(포병)복무를 거쳐 서울 대광중학 미술교사로 첫발을 디딘 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응모하여 3000여 응모작 중에서 당선되어 은 이루었다. 이후로 자작시화전을 서울을 비롯한 전국각지와 머얼리 태평양 바다건너 일본, 미국에까지 순회 전을 가져왔다,

오늘도 각 문학잡지 고문, 편집위원, 문학관련 상과 신인발탁으로 분주하다, 60여년을 쓰고 발표해왔다. 아직도 문인산악회원들과 매주 산행하는 건강에 감사할 따름이며 주어진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재능봉사하며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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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문학은 명예나 장식품이 아니다 나의 피나는 노력으로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너무 안이하고 문단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다. “단 한편을 남길지라도 피로 쓰는 각고(刻苦)의 노력을 다하는 시인으로 부지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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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세계

 

장윤우 시인의 시를 평하면서 그의 남성적 목소리를 지적한바 있는데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역시 그 때의 생각이 옳았다는 느낌을 갖는다. 확실히 그의 시에는 여성적인 섬세함이나 부드러움이 없다. 곱고 완결되고 가냘프고 꾸며진 그리고 심정적(心情的)인 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의 시는 질박하고 거칠다. 언뜻 보기에 구성도 산만한듯하며 표현 역시 투박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 쏟는- 그리하여 호탕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독자들은 그의 시에서 고전적 미학(美學)이 이상으로 삼는 정관적(靜觀的) 아름다움(Beauty of Contemplation)을 찾는데 실패할 것이다. 그의 시는 세계나 사물에 대해 어떤 미적(美的) 거리를 갖고 응시하는데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와 함께하는, 그리함으로써 자신을 세계에 투사하는 행위로 쓰여진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종래의 전통적 서정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리리시즘- 애상(哀想)이나 슬픔, (), 그리움 등과 같은 정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정적 정서들은 자아(自我)와 세계가 단절되었거나 혹은 자아가 억제, 폐쇄당할 때 생기는 감정들인데 장윤우의 시는 그와 반대로 자아가 세계에 연속되고 나아가서 그것을 세계(世界)에 투사시키는 데서 쓰여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록 그의 시에서 울분이나 좌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그것을 안으로 안고 응어리를 만들며 삭이기보다는 밖으로 내 뿜고 토로하거나 세계를 질타, 혹은 매도함으로서 풀어버리기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시는 활달하다. 어떤 망설임이나 눈치 보기 또는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자신이 이 세계와 외면(外面)하여 느끼는 것으로 불만스러운 것이나 혹은 만족스러운 것은 곧 바로 시로 형상화한다고 오세영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의 시는 전위(前衛)나 실험시의 극단성을 지양하면서 어떤 틀에도 자신의 시를 예속화하려들지 않는 시도로 보여진다. 다만 시의 전체적 맥락의 연계성에서 볼 때 하나의 에콜을 형성하고 자아(自我)에 대한 조명(照明)이 아닌가 싶어진다. 많은 시편들이 자화상(自畵像)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런 것 속에서 필자는 그와 꼭 닮은 자화상을 본적이 있는데 이때의 자화상은 그림으로서의 완벽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자화상은 자신의 외적 표현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언어의 형상화를 빌어 그린 자신의 모습이란 점에서 자신에 대한 내적표현은 물론 인생론적(人生論的) 자아(自我)의 조명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윤우의 실상(實像)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을 미화(美化)한다거나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적으로 표출하고 있어 진솔한 설득력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전제(前提)가 장윤우 시에 대한 정신본질(精神本質)에의 접근방식이라면 그의 시에 있어서의 표현본질은 그가 기법으로 즐겨 원용하는 콜라쥬수법에 모아진 것으로 본다. 그가 그림으로 그린자화상(自畵像)이 화가로서의 자신의 재현(再現)이었다면 시로서 그린 자화상은 언어로서 그린 내적자아에 해당된다. 마찬가지로 그가 콜라쥬수법을 즐겨 사용한 것은 금속공예가로서의장인(匠人)의 기법으로 보아줄 수도 있고 이를 시에 원용(援用)했던 것이 시에 있어서의 콜라쥬수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그는 화가(畵家), 금속공예가, 시인(詩人)이라는 겸업(兼業)의 장인으로 보아줄 때 그의 시는 예술의 매제(楳材)를 언어로 채용(借用)했다는데 귀결되고 동시에 한 몸뚱이에 돋아난 세 얼굴중의 하나를 대표 할 수 있다고 박진환 문학평론가는 말하고 있다.

 

장윤우 시인의 제13시집종이로 만든 여자와 제12시집뚜벅이 반추에서 세월의 흐름에 대한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자신의 입지를 실토하거나 오늘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많은 사람들의 심정을 대신 나타내고 있다.

그는 동양적 정서와 조형, 전쟁과 일상, 허무와 가족, 산과 풀잎, 술과 여행 등을 시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대중과 접근하는 시를 쓰려고 노력한 시인이며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시인이 살아오는 일상의 삶 속에서 많은 소재들이 나타나고 있다.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품인겨울동양화이후 많은 시집을 창작하면서 시는 문학이라는 테두리와 미술이라는 테두리를 접목하면서 폭 넓게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그것은 시인이 간행한 시집의 몇 가지 제목에서도 볼 수 있다.형태의 삶,시인과 기계,두개의 풍경과 리삼월등은 시와 미술, 그리고 공예와 조형의 틀을 동양적 정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인의 많은 작품은 하나의 형상학적인 구도 속에서 자신의 일상을 돌이켜 가면서 무엇인가의 핵심적인 조감도를 또 하나의 색다른 공예작품으로 조성하려는 것은 아닐까.

장시인은 시작품에서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상적인 화두가 많다. 그의 화두는 솔직하다. 표현의 은유보다 진솔한 일상을 그대로 보여 준다. 13시집까지의 긴 행로는 시와 공예라는 예술적 조화 속에서 만들어 낸 인생의 조감도가 펼쳐진다. 이들 시인들에게서 삶의 애환과 역사의 단면에서 오는 삶의 질곡을 말하고 싶어 하는 까닭은 그렇게 많은 역사의 여러 항목을 살아왔다는 자신의 생활이었기 때문일까.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시인들, 특히 60년대를 거슬러가야 시의 현상을 익혀가는 현대시의 고뇌라고 조병무 문학평론가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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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윤우 (張潤宇) 약력

 

 

서울 출생(1937121),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등단(1963),

현대시인상, 순수문학상, 영랑문학상, 한맥문학상, 서포문학상,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장상, 8회 시와 예술상, 서울시문화상(98), 국민훈장(2003,황조근정훈장) 수훈.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부이사장, 홍보위원장, 월간문학 발행인 역임.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장, 대학원장, 산업미술연구소장등 역임,

서울문우회 회장, 서울대학교 미술대대학원 강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시집겨울동양화,그림자들의 무도회,오자인생,형해(形骸)의 삶, 이름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뚜벅이반추,세번의 종(),그겨울 전차의 포신이 느린 그림자,두개의 풍경과 리삼월,종이로 만든 여자13,

산문집 :화실주변,인간박물관,장윤우예술시평집,글과 그림의 팡세외 다수.

중학교 검정미술교과서 1.2.3.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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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주요작품

 

 

오자(誤字)인생

 

 

 

드물게 화창한 날

집안에 나 혼자 뒹굴며

아까운 나이를 손가락으로 되짚으며

괜스레 술잔에 독백(獨白)하는

중년객(中年客)이라면 너절한 꼴일까

먼지 쌓인 서가(書架)에 걸맞은

낙서로 꽉 찬 인생의 머리에

하얗게 내리는 무상(無常)

눈가의 주름과 한숨으로 찌르는

좋은 날 오후의 무심한 강()줄기

남긴 거라곤 찡그리게 하는 배설물

오자(誤字)투성이

죽음과 삶 사이에서 꼭 죽어야겠다고

20일간에 250편의 시를 써낸

박정만시인으로 문단이 벌컥 뒤집혔는데

비인 잔으로

자조(自嘲)의 저녁을 맞는다.

오늘도 별 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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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東洋畵

 

 

 

화롯불 놓고

천 년이

조용히 흘러간다.

 

구총산(九寵山) 붓에서

옥같이 구슬려 나오는

사군자(四君子)의 정에

겨울밤이 화안히 핀다.

 

월전(月田) 선생께서

이르기를

<책을 만 권 읽어라>

평생에 가슴 속에 심고

화육법(畵六法)에 앞서

마음이 정()해야지

()과 신()이 갈앉고

눈시울을 서서히 들어

유연히 벽을 대하니

형통(亨通)하다.

 

접시를 모으다 보니

별난 감이 다 든다.

가루를 물에 정하게 풀어

큰 접시, 조그만 접시에 나눠 놓고

임리(淋悧)히 번져가는

소리

귀에 솨악

듣는다.

밖엔

눈이 그쳤는지

봉당개 짖는 소리

멀고

보름을 먹은

달은

고연스레 내 외로움을 더 하게 하니

에라, 오늘은 붓도 먹도 집어치고

따끈한 정종이나 한 잔 할까,

안주로는

엊그제 끝낸

수꿩을 보지,

언뜻

멀리 인경소리 들리는 듯 싶어

혼자, 실소(失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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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종()

 

 

 

한 삶을 고이 지켜

교회의 종은

일생에 세 번 울린다

 

생명의 탄생을 온 누리에 알리면서

젊은 한 쌍의 희망찬 출발을 축복하고

그리고 쇠잔한 몸으로 생을 끝맺을 때

 

비바람 세차거나 캄캄한 어둠에도

그 자리에 굳건한 성전

우리들이 매양 잊는 거기에

 

언젠가는 단순한 삶을 쉬며

굳어가는 육신을 이끌어서라도

나는 세 번의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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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풍경과 리삼월

 

 

 

한민족 작가 서울대회에서 만난

리삼월 시인의 글에는 풋풋한 고향 내음이 있다.

흑룡강에서 온 북방조선족 문학 작품집의 주인공

그와의 만남은 어떤 인연일까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내 어린 시절을 되돌려 준 그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몰라도

영혼의 작은 불꽃을 쫓아

나는 이따금 하얼빈에 간다

어설픈 시집과 그의 표정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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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여자

 

 

 

어느 곳에 있지 않은

안개꽃처럼 밤이면 유혹하는

그것은 내게

무엇으로 명령합니다

 

당신은 지엄 합니다

가없는 편력의 들녘에서고

Glass 잔의 끝 방울에서고

 

미소를 싣고 오는 향음

안데스74의 깊은 산록

 

눈 밑에 시린 발에까지

물론 그것은 모딜리아나를 보면

내 눈 속엔 더욱 분명하였습니다

 

가슴은 처녀림 속

에델바이스

 

어느 한 곳에서고 보이지 않는

허나 밤꽃 내음처럼

밤이면 미쳐오는

 

몇 곱의 진동으로

나는 울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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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2016년 시전문 계간 시세계 겨울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