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 탐방

2015년 서울초중등문학교육연구회 하계자율연수(2015년 7월25일)를 다녀와서

2015년 서울초중등문학교육연구회 하계자율연수(2015년 7월25일)를 다녀와서


윤제철


1.윤동주문학관









  2015년 7월 25일은 서울교원문학회 자율연수의 날이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출구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가야했다. 10시 정각에 시작하기로 했지만 여의치 않아 최규식경무관의 동상을 보며 찾아들어가니 이미 해설사의 설명이 전시관내부에서 많은 회원들을 상대로 시작되었다.

  연변지역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리며 열성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이날 하루를 역사의 현장으로 오가는 장을 열었다. 겸허한 인간 본연의 자세에서 자신을 다독이며 빼앗긴 조국의 아픔을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들여다보았다.

  문학관은 겉에서 보는 단순하고 왜소한 느낌에서 들어와 내용면에서 알찬 기획에서 관리까지 공감대를 높여 시인의 시세계를 알려주었다. 시를 쓰는 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덕이 아니더라도 생전에는 시인으로 불려질 수 없는 시대에서 하숙을 함께 했던 정병욱에 의해 드러내 비로소 그를 세상에 알려지게 한 만남의 인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이동장소는 지붕이 없는 홀이었다. 시세계를 피부로 닳을 수 있도록 준비한 열성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말년을 보내야했던 형무소의 하늘처럼 사방이 막힌 하늘이었다. 그 안처럼 조국을 잃은 모든 국민들이 사는 터전이 그랬을 것이다. 물탱크로 쓰였다는 영상실은 그의 중요시와 일생에 대한 영상이 비쳐졌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 보니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의 자화상(自畵像) 전문


2.윤동주시인의 언덕



  문학관을 나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올랐다. 창의문 아랫길로 가다가 옛 성곽의 일부를 끼고 언덕길로 올랐다. 오붓한 야외공연장이 보이고 서시(序詩)가 새겨진 시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는 내렸지만 모두는 숙연한 마음가짐으로 시를 읽었고 오랜 기억을 위해 기념촬영에 임했다. 그리고 서시정(序詩亭)이 시인의 뜻을 기리는 냥 서시를 보듬고 일행의 이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 산책에 나서는 발길을 가볍게 해주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序詩) 전문


3.청운동산책







  고 정주영회장 청운동 자택은 한북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인왕산으로 솟은 용맥이 동진하면서 생기를 맺은 와우형의 명당이다. 기가 센 사람만이 살 수 있었다는 이곳이 정회장과 잘 맞았다는 것이다.

  인왕산 아래 청운동 일부 계곡을 포함한 청풍계는 대부분 주택가로 변하였다. 조선시대 충신 김상용이 살던 집과 사당 등 유적이 남아있어 알려졌다. 김상용이 살던 집을 태고정(太古亭) 또는 선원고택(仙源古宅)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중기 시인이자 문신인 송강 정철의 집터가 청운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학교 담에는 정철 작품비가 세워 있었다.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훈민가(訓民歌) 등이었다.

  청전 이상범화백은 1928년 <동아일보> 학예부로 자리를 옮겨 삽화를 그렸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에서 일장기를 지운 역할로서 직접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혀 40여 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금강산 등을 여행하며 실경 스케치를 했으며 후진양성기관 ‘청전화숙’ 운영에 전념했다. 미술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한 그는 정선 장승업 이후 최고의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통의동 정부홍보관으로 용도 변경한 건물 앞, 박대통령 시해사건 현장이 건물은 없어지고 태극으로 암시되어 구조물로 보존되어있었다. 함께 있었던 인물들의 모습이 떠올라 또다시 역사의 회오리를 만났다.

  골목 안에 50미터 지점 백송이 있는 창의궁터 옆에 추사 김정희 생가가 있었다. 통의동 백송을 살리기 위해 주민들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여러 그루 백송을 심어 가꾸고 있었다.

  박노수 미술관은 한말 문신으로 악랄한 친일파였던 윤덕영 딸의 집으로 서양식 건물이었다. 1910년 일본이 우리국권을 뺏을 때 순종에게 강요하여 합방조약에 옥새를 찍게 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친일의 대가로 일본으로 부터 옥인동 일대 전체의 절반정도나 되는 많은 토지를 사드려 자기 호를 붙여 벽수산장이라 하였다.

  이상의 집은 이상의 백부 집이었다는 작은 집, 문학가 이상이 실제 거주했던 곳이다. 길가에 드러난 여닫이문에 적인 알록달록 선과 글귀를 써서 그의 문학세계를 표현하고자 애쓴 흔적이 묻어있었다. 실내에는 이상을 기념하는 엽서와 다양한 책, 아기자기한 꽃병 등 따뜻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노천명 시인이 살던 집은 이상의 집 건너편에 있는 골목에 있었다. 새 단장 하느라 출입을 할 수 없었다. 불운하게 꼬인 삶의 현장은 아무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조선시대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동네라서인지 지금도 작은 규모의 기와집들이 올망졸망 들어서 정다운 골목길을 둘러보았다.


4. 점심식사


  거의 2시간 가까이 빗길을 약 3킬로미터를 걸어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강행군을 했다. 평소에 접할 수 없었던 청운동일대를 산책을 하며 많은 것을 생각해야 했다. 일행은 경복궁역을 지나 서울매동초등학교 인근 청국장집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날씨가 고르지 못한 가운데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참석해주신 것이 고마웠다. 작은 방 세 군데로 나뉘어 자리를 잡아야했다. 가까이 지내던 분들끼리 어울리는 자리가 되었다. 문학서울의 발간이나 문학적 소양을 향상 시키는 방안에 대한 토론이 주가 되었다.


5. 수성동계곡 정자


(위 사진은 노선관 선생님께서 촬영한 것입니다)


  일부 회원들은 헤어지고 대부분은 정종배 회장이 제의한 수성동계곡으로 옮겨 자리를 함께 하였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어떻게 할 수 없이 이야기는 전개되었다. 참으로 장소에 다른 주제의 면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떠오르지 않던 상념들이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흘러가는 세월을 어잘 수야 없겠지만 겸재정선의 수성계곡에 나타난 돌다리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다가 철거된 뒤에도 보존에 힘쓴 주민들 덕분에 그대로 남아 호흡을 다듬고 있으니 문화에 대한 열정은 말리지 못할 큰 힘을 지니고, 한껏 내린 빗줄기로 계곡물은 힘을 찾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