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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칼럼

세뱃돈을 준다는 것

세뱃돈을 준다는 것


  오늘은 설 다음날이다. 처제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큰 언니인 아내를 비롯해서 우리 가족을 만나는 날이다.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세배를 받는 날이다. 장인, 장모님이 살아계셨을 땐 처가에서 만나 이루어졌던 일인데 이제는 장소가 달라진 것이다.






  오늘은 세 처제들이 참석하면서 조카들까지 모두 열세명이 함께하는 자리가 되었다. 음식과 선물을 준비하여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식사시간 보다 일찍 모여 점심을 준비하여 식사를 마치고 예전처럼 덕담을 들려주며 세배시간을 가졌다. 직장에 다니는 조카들이나 늦둥이 초등학생은 만원을 주고 중등이상 학생은 5만원을 봉투에 넣었다. 돈을 버는 조카들이 세뱃돈을 사양하였으나 받으라며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아내와 처제들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조카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안을 돌아 놀이터 시설이나 기구를 이용해 소화를 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셨다.






  자녀들에 대한 당면문제를 놓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오늘 네 자매가 어우러져 빚은 만두를 쪄 먹었다. 절에서 지내는 장인, 장모 제사에 관한 협의도 있었다. 제사를 맡아서 지낼 처남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에도 슬기롭고 착하게 살고 있는 모습들이 대견하였다.



  어제나 오늘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세배를 받았다. 누군가에게 손위 사람이 된 이후부터 세뱃돈을 주는 입장이 되었다. 단순히 도리로 세뱃돈을 주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오늘은 무언가 애틋한 느낌이다. 내 모습을 비로소 바라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커서 성년이 되었고 돈을 벌게 되면서 올라가던 세뱃돈이 끊기거나 적은 액수로 쑥스럽게 사양하면서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가하면 나는 직장을 고만두었고 수입도 연금 이외엔 없다.

  건강도 관리를 해야 할 시기에 와있다. 아이들 앞에 큰 존재에서 작아지는 존재로 탈바꿈되어가고 있다. 말발도 예전처럼 서지 않는다. 다 자란 아이들에게 주는 세뱃돈 의미를 생각해본다. 손위 사람을 찾아뵙고 새해를 맞아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올바른 생활을 하겠다는 미음으로 다짐하는 의미에서 비롯된 인사가 되었다. 세뱃돈은 세배를 한 아이에게 주는 돈이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요즘은 아이라는 말 대신 돈을 벌기 전까지 주어야할 상황이다.

  돈을 많이 주는 경우와 적게 주는 경우는 사람의 성의나 경제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주는 사람이 정해서 주고 싶은 만큼 줄 수 있다. 받은 입장에서는 많이 받으면 기분이 좋을 테지만 적게 받으면 섭섭하기는 해도 거절할 수는 없다.

  내 생각은 돈을 버는 손아래 조카들에 대한 것이다. 자식들이야 가까이에서 지내지만 조카들은 나름대로 시간을 내어 세배를 하러 찾아온 것이다. 고마운 일이라면 오가는 정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주는 정도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줄 수 있을 때까지 어렸을 때부터 주던 돈을 번다고 해서 안주는 건 주는 입장에서 섭섭한 일이다.

  세뱃돈을 줄 수 있다는 것 또한 작은 자존감이 생겨날 수 있다. 조카아이들과 이모나 이모부로써 관계가 탄탄하게 이아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손위나 손아래를 막론하고 사랑은 크나 작으나 베풀어지는데서 머물며 따뜻하게 우리들의 삶을 감싸주고 있는 순간들의 연결로 만들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