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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북유럽 8개국 12박 13일(2012년 7월 23일 - 2012년 8월 2일)을 다녀와서

 

북유럽 8개국 12박 13일(2012년 7월 23일 - 2012년 8월 2일)을 다녀와서

 

윤제철

 

 2012년 7월 22일 일요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예정보다 조금 늦은 오후 1시10분이 지나 모스크바를 향하여 이륙했다. 북유럽과 덴마크, 발틱 3국, 그리고 러시아 등 8개국을 도는 12박 13일의 여정이다. 모스크바로 가서 다시 노르웨이의 오슬로로 가게 된다. 일행 28명은 박종란 인솔자와 전 일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인천 - 노르웨이(오슬로) - 덴마크(코펜하겐) - 스웨덴(스톡홀룸) - 리투아니아(리가) - 라트비아(탈린) - 에스토니아(사울레이) - 핀란드(헬싱키) - 러시아(쌍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 인천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되어있다.

 

7월 23일

 

아침을 먹고 나서 오슬로에서 버스를 타고 파게르네스로 향하였다. 시간차는 썸머타임으로 7시간차를 두고 있었다. 현지가이드가 없이 진행되는 코스였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는 곳이다. 산 속 깊은 곳으로 그야말로 어머니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여행지였다. 여행은 정신이 젊어지는 일로서 많은 추억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여러 날을 안전하게 이동시켜줄 기사는 폴란드인 바펠이었다. 인사말로「안녕하세요」를「진도부리 바펠」이라고 배웠다.

노르웨이는 인구가 469만 명인데 오슬로는 인구가 50만 명 정도 되는 행정수도이다. 스웨덴으로 부터 독립할 땐 쓸모 있는 땅이라고 여긴 아래쪽만 갖고 위쪽은 척박한 땅이라고 모두 내어준 것이 오판이었다. 주요 산업은 선박중계업, 해상보험, 관광서비스업, 수산업, 어업 외에 감자, 보리, 귤, 호밀 등을 재배하고 있다. 기름을 짜는 유채꽃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늦게 피는 편이었다. 1970년에 북해지역에 유전(석유, 천연가스)개발로 산유국아 되어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치 않는 나라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북해 인근 베르겐의 어업(대구잡이), 농업 등 경제 피해가 우려되어 EU에 가입을 하지 않고 지낸다.

비가 오면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은 자연, 국토 3%가 농토로 이용될 뿐이다. 길이가 1750킬로미터, 면적이 32만 평방킬로미터나 된다. 위도가 57-74도가 되다보니 백야(밤이 없는 시기), 극야(9시에서 10시까지만 밝고 오후 2시 이후는 어두운 시기)현상이 있다. 빙하에서 생성되는 물로 많은 빙하호수와 피오르드를 만든 풍부한 수력국가이다. 빙하는 눈이 압축되어 만들어지는데 눈 900밀리미터가 다져지면 빙하 100밀리미터가 된다. 만년설은 하얀색이지만 1000미터 이상의 산에서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이 호수가 되면 광물질에 따라 호수 색깔이 다르다. 일자산으로 깎여진 바닷가와 연결된 해안을 피오르드라 하는데 뉴질랜드 남섬이나 캐나다에도 있지만 노르웨이가 가장 많아 전체 길이 2만5천 킬로미터나 된다.

  덴마크로부터 300년이나 지배를 받았고, 스웨덴에겐 100년을 지배를 받다가 1905년에 독립을 하나 2차 대전 때 철광석이나 중수, 핵무기 개발 등에 쓰일 물로 인하여 나치에 피해를 입었다. 스칸디나비아는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외에 덴마크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고, 발틱 국가에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3국 외에 덴마크가 포함된다고 했다. 숲에는 가문비나무, 자작나무, 전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자연파괴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9월부터는 눈이 많이 내려 관광을 차단하고 있을 정도였고 호텔이나 도로확장 조차 산림훼손 유의사항에 포함되고 있어 청정지역으로 남아있다. 사회보장제도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에서 책임을 진다고 헸다. 아동수당은 16세까지 받고 18세가 되면 모두가 부모로부터 독립되어 집을 나간다. 대학까지 학비를 무료로 국가에서 지급한다. 모든 국민들은 본봉의 40-60%를 세금으로 내고 기초수급자나 연금수급을 받아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실업수당은 1년간 급여의 80%를 지급한다.

 걸음을 걷기 전에 스키를 배울 정도로 모두가 즐긴다. 요트하이네는 눈이 쌓인 산 트래킹 코스를, 루삐나는 빙하로 생긴 꽃밭 같은 여러 가지 색 꽃을 말한다. 지붕 위에 풀을 심어 방수처리를 했다는 전통가옥들이 도깨비 같은 인형요정들과 함께 아직 남아있다. 빙하는 만년설이 굳어서 만들어지면 푸른색을 신비스럽게 띄고 있다. 영어로 노르웨이라 하지만 노르겐 이라는 어원은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청정지역인 오따 까지 페스트 전염병이 번졌다니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옴바스는 호텔이 있는 곳으로서 스키, 리조트 지역이다.

 

 

7월 24일

 

버스로 달리다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기독교 교리에 용을 숭배하던 민속신앙을 합하여 이뤄진 스타북 교회를 보았다. 떡갈 나무 구조로 이뤄진 건축물로써 매년 송진을 칠해주고 있다. 루터 복음지로서 유일한 교리 성서 반대자인 루터는 투옥 중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는 성과를 거두고 뒤를 이어 칼빈이 종교개혁에 성공했다.

높이 오를수록 나무는 키가 낮아지고 있었다. 산위에 만년설과 별장들이 띄엄띄엄 창밖으로 보인다. 빙하가 작년에 내린 눈으로 가려져 푸른빛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눈이 녹거나 눈이 빙하가 되는 시기까지 기다려야 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랑헤르 피오르드는 크루즈를 타고 헤르실드 폭포가 하얗게 물보라를 뿜으며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아기자기 한 피오르드 이다. 송내 피오르드는 204킬로미터나 되는데 강이나 호수로 분류되지 않고 그냥 피오르드로 부를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베르겐의 하당 피오르드는 240킬로미터지만 목가적 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지만 대표적인 세 피오르드를 손꼽고 있다.

피오르드 주변 도시 중 가장 큰 도시는 송달이다. 1차, 2차, 3차 산업이 고르게 발달된 곳으로 인구는 6만 명이다. 신발공장을 세우면서 많은 도로변에 주택이 들어서 발달되어 비행장까지 갖게 되었다. 이 지역의 백야는 5월 22일에서부터 7월 22일까지인데 6월22일이 가장 절정에 이른다.

 

 

7월 25일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비를 뿌려주고 있었다. 베르겐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없어 어려움을 겪던 상황에서 코치투어(역마차), 버스투어가 가능해진 것은 터널을 뚫을 수 있었기에 가능해졌다. 거금 1500억 원을 들여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로 길이가 무려 24.5킬로미터나 되는 작은 도시 아우랄의 이름을 따서 붙인 아우랄이다. 이 도시는 수력발전으로 잘 살게 된 곳이다. 터널 안에는 3게의 푸른 빛 홀이 설치되어 사고 시에도 차를 돌릴 수 있게 만들었다.

구르빌 계곡을 지나 철도교통의 요지인 보스는 전쟁 피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만 남아있었던 인구 8만 명의 도시이다. 노르웨이는 5대 도시를 제외 하고는 비교적 큰 도시에 속한다고 했다. 특히 동계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베르겐은 어업으로 대구를 잡아 돈을 번 곳이다. 독일 상인의 저장고라고도 부를 만큼 독일 한자(무리)무역의 본거지였다. 건어물, 소금, 모피 등 생활필수품이나 크루즈로 부를 누리게 되었다. 대화재로 복원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산악열차를 타고 전체길이 20킬로미터를 올라갔다가 180도를 회전시켜 타고 내려오는 옵션투어였다. 왕복 약 2시간이 소요되는 그 중간에 터널 구간이 여러 군데 합쳐서 6.5킬로미터나 되어 사진을 찍으려면 순간을 잘 포착하여 찍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사 철로로 세계 10대 경관을 달리는 협곡 세계철도사를 다시 쓰는 쾌거를 이루었다. 높이 98미터의 폭포수가 위용을 자랑하며 물보라를 뿜으며 일행들을 뒤덮었고 요정이 춤을 추며 반겨주었다. 디카 사진기 전기충전용량이 다 되어 더 이상 찍을 수 없는 상태까지 찍고 말았다.

 

 

7월 26일

 

노르웨이는 크레탄 호수와 같이 크기가 100킬로미터가 넘는 것은 무려 20개나 되고 크고 작은 호수가 20만개 정도 있는데 모두 푸른빛을 내는 1급수라고 했다. 낚시는 면허를 얻어야 하고 일정 크기 이하는 놓아주어야 한다. 요즘은 바캉스를 떠나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화장실은 먼저 들어간 사람이 카페, 아이스크림, 아문젠이 탐험할 때 먹었다는 프레이어 초코렛 등릉 소비해야 무료로 가능하지만 요금으로만 2유로 정도는 내야한다.마지막으로 키른 호수는 뒤로 하고 오슬로로 향했다.

 콰이안 거리는 왕궁, 국회의사당, 그랜드호텔(노벨상수상식 전날 숙소), 칼멜 요한의 거리(길이가 2킬로미터 상점, 레스토랑 등으로 가장 번화한 거리) 등이 있다. 시내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60-70%는 관광객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관광을 나간 상태라고 했다. 분수대는 여름에 전용이지만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국립대학교 법학대학은 보수중이어서 볼 수 없었고 칼 요한 국왕집무실이 있는 왕궁, 외무성, 중앙차선은 전국으로 뻗어나간다. 왕궁공원, 입센박물관, 미국대사관(유일한 울타리 있는 건물), 왕궁 뒤편에는 각국 대사관 관저가 있다. 강을 기준으로 해서 동쪽은 노동자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서쪽은 귀족이나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비싼 가치를 지닌 동내로 구성되어있다. 낡고 볼품없는 집조차 12-15억 원 정도나 한다니 강남수준이라 하겠다.

 플로네르그 거리는 비겔란 조각공원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전철과 차가 같은 도로를 쓰고 있어 국제적인 브랜드는 찾기 어려운 곳으로 국내산업을 중시여기고 있다. 한 개인이 기획하고 조각을 하여 만든 공원이로 규모나 정성이 대단하다. 공원입구에 다리가 있고 다리 아래에는 물가에 태아와 어린 아이의 성장을 조각으로 원형 전시하고 많은 조각 중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다리 왼쪽에「심술쟁이」라는 제목을 가진 조각이다. 작은 어이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으로 다리를 분실했었다가 범인이 스스로 용접하여 복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분수는 남자 여섯 명이 물을 받치고 인생을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다.「모노누드」라는 제목의 단 하나의 기둥으로 수많은 군상이 쌓여있다. 또 하나는「인생의 바퀴 혹은 굴레」로 둥글게 얽혀 원을 그리는 인간상이다.

 2-3명의 아이를 낳는 어머니들이 많은 살기 좋은 나라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출산기금 600만원, 조산원 점검관리, 병원비용 등 국가지급, 출생일 이후 예방접종은 보건소에서 실시한다. 양육은 3세 이하부터 46주 유급후가, 성장하는 아이의 성격형성을 위한 아버지 육아휴가까지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성적을 내지 않고 고등학교에서 인문계와 실업계(목공, 전기 등)로 나누어 실업계에서는 현장실습 후에 취업을 할 수 있다. 대학졸업을 한 사람보다도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 시간당 15-20만원을 받는다. 일정소득이 넘으면 56% 세금을 내기 때문에 직업에 귀천이 없다. 대학졸업을 한 공무원이나 교사들은 550만원 보수를 받으면 36% 세금을 제하면 비수한 생활비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기 있는 직종은 선박엔지니어링 금융이라고 했다.

 오슬로에서 크루즈를 타고 1박을 한다. 하나의 큰 건축물 안에 작은 방을 사용하는 호텔 같은 곳이다. 침대는 2층으로 되어 있었다. 갑판에 올라 어느 가수의 노래를 감상하는 서양 사람들 곁에 앉아 함께 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면세점을 들러 생활필수품을 구경하다가 숙소로 들어가 잠을 청하였다. 노르웨이 자연관광을 하고 다닐 때에는 덥지 않아 좋았는데 위도가 내려오면서 점점 기온이 오르고 있었다.

 

7월 27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갑판에 앉아 유럽 사람들과 어울려 앉아 그들이 모습과 표정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올림픽 경기가 열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진정한 메달은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얼마나 보호를 잘 받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가 넘어서였다. 전체인구 530만 명 중에 130만 멍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경상도 크기만 한 4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진 나라였다. 인구밀도와 관광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로서 이민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7-20℃ 기온이 여행하기에 적당한 날씨였다. 노르웨이에서 오신 아이들 4명과 어른 셋이 합류하여 일행은 35명으로 늘었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인어공주상을 보려고 버스에서 내렸다. 바닷가에 위치한 인어공주상은 겐덴프렌서양 체구의 1.5배 크기로 만들었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된 인어공주상을 보러온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좋은 자리에서 한 장면을 찍기에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발틱해 인접지역의 서안해양성 기후의 바람이 불어왔다. 가뭄, 폭우, 태풍, 지진이 없는 지역이었다. 생명공학 등 금융, 복지 등 저탄소도시를 비롯한 환경분야 선진국이다. 낙농, 축산업이 주산업이었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었다.

 이어서 건국신화 분수대로 이동하였다. 이데피온이 미녀신과 하루를 지내고 받은 땅으로 세운 나라가 덴마크라는 건국신화를 조각과 함께 만든 분수대이다. 채찍을 들고 소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야심찬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옆에 서있는 마르틴루터 복음 교회에 들러 내부구조를 살폈다. 자리를 옮겨 걸어가서 아멜란드 궁전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중앙에 광장을 두고 둘러싸인 건물들은 모두 4개로 되어있다. 여왕의 거주실, 여왕의 집무실, 황태자집, 영빈관으로 되어있고 정원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왕의 광장은 지하철 공사중이라 볼 수가 없으나 완공되면 공항까지 8분 걸린다고 했다. 주변에 골동품 안틱 가게, 왕립예술극장, 왕립 도서관, 오래된 왕립백화점등이 눈에 들어왔다. 안델센이 좋아했던 뜨골리에 공원을 그의 동상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자연은 인간이 없어도 살지만 인간은 자연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만큼 북유럽에 속하는 나라에서는 자연에 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갖게 자연을 보호하고 있었다. 당뇨 대국인 이 나라는 후유증인 각막노화 손상이나 안압을 조절하는데 도움을 주는 블루베리에는 민들레 성분이 많이 들어있고 했다. 국민의 70%가 자전거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며 그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라고 했다.

 헬싱괴르 선착장으로 가서 페리 편으로 스웨덴 헬싱보리로 햄릿의 배경이 되었던 크론부르크 성의 무대를 보며 이동했다. 해마다 햄릿 역할을 잘하는 배우를 뽑는데 그중 한 사람이 크리스챤 베리라는 배우가 뽑힌 바 있었다. 길이가 130km나 되는 보튼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왼쇠핑에서 일박을 했다.

 

 

7월 28일

 

북유럽의 베네차아라고 불리는 곳이 160만의 인구를 가진 수도인 스톡홀룸이었다. 맬라른 호수는 식수가 가능할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10대 아름다운 수도에 뽑힐 정도로 예쁜 도시였다. 왕의 섬 속에 파티장소로 쓸 수 있는 시청사가 법원, 도청, 시경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노벨은 스웨덴의 화약개발을 한 사람으로서 세계적으로 6개 분야에 공헌을 남긴 사람들에게 시상하라는 유언에 의해 800만 달러의 유산으로 해마다 주는 상으로 1901년 12월부터 컨설트하우스에서 사망한 날을 기념하여 시상을 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처음에는 스웨덴 사람들이 자국을 위해 일한 사람에 상을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갖기도 했다. 평화상만 유언에 의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식을 하고 시청사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고전인 로코코 건축양식과 현대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도시였다.

 스웨덴에서는 구교와 신교가 간월적으로 전쟁을 하였는데 30년 전쟁으로 절대강자로 부상하여 패하지 않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스톡홀룸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크고 활기 있고 우리정서에 맞는 도시라 할 수 있다. 호수 주변의 배는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섬에 시청사가 있다. 이 도시는 통나무가 혼자 떠있던 곳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자손들에게 잘 되라는 염원을 담아 목마를 선물로 주는 풍습을 지니고 살아왔다. 아직도 전깃불 보다 촛불을 많이 사용하는 습관으로 크리스탈 아트 유리공예가 발달된 동기가 되었다. 또한 여성들은 화장품 보다는 장신구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칼구스타프 16세 왕궁은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 바로크, 로코코 양식이었다. 정원이 없었으며 집무실, 영빈관, 박물관 들 왕이 출타 시에 공개하도록 되어있었다. 그후 왕자, 공주를 위해 밖으로 이전하였다.

 남섬에는 부모가 돌봐 주지 않는 18세 이상 독립한 젊은이나 노인 독신자들을 위한 임대 아파트가 80%이상이나 되었고 노무자들의 빈민촌으로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문인들이나 예술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잡상인들은 없고 노천에 과일 정도를 파는 시장이 있을 뿐이었다.

 버사 전함박물관에는 전함으로 사용하려던 배가 전쟁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고로 인하여 2만 여명이 수몰되었던 유물들을 인양해 보관하고 있었다. 구스타프 버사 국왕이 당시로서는 가장 큰 배로 만들었지만 밑바닥에 깔아놓았던 자갈이 채워지지 않아 한편으로 쏠리면서 기울어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하여 멀리가지 못하고 가라앉고 말았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조선기술이나 선원들의 생활모습 등을 알 수 있어 역사적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외관의 화려함은 오늘날의 배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화려하였다. 필자의 디카로는 어두운 박물관 안에서의 내용물들을 찍을 수가 없어 유감이었다.

 아무리 잘 잘아도 문화가 없으면 힘이 없고 못살아도 문화가 있으면 힘을 느낀다. 루블박물관에서 한국어로 안내하는 것은 문화비 투자에 달려있고, 실비아성당에서 천장의 그름을 털어주고 일본어로 안내 방송된 예가 있다. 전쟁 폭격시 소중한 문화재가 돌로 만들어진 문화는 오래 보존 되었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는 쉽게 소실되고 말았다. 먹고 살만한 가운데 문화가 살아난다고 볼 수 있다.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서민들의 애환을 나타낸 것으로 음악의 수준을 느끼게 하고 국악, 대중가요는 민족의 한을 표현한 것인데 수준 아래로 여기는 것은 나븐 경향이다. 일본은 명치유신 때 영국영향을 받아 영국인처럼 문화를 형성하여 유럽에 그 문화를 전달하였다. 그후 재벌 부인의 희망은 미술관 관광,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다음 일정인 핀란드로 가는 크루즈선 실라라인을 승선하기 위해 스톡홀롬 항으로 이동하였다. 베에 올라 짐을 푸는 사이에 배는 어느새 출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작은 방에 이층으로 된 침대를 사용해야했다. 필자는 이층에 올라가서 안전도를 점검하고 내려왔다. 7층에는 레스토랑이나 클럽, 바, 쇼핑코너, 카지노, 사우나, 미용실, 어린이놀이 공간까지 설비되어 있는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저녁식사를 뷔페로 일행들이 모여 앉았다. 마침 인솔자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빌늬우스나 트라카이성을 보지 않고 십자가의 언덕을 보는 것에 대한 일행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서 여행사에서 아무런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인솔자선에서 해결되기를 바라다는 의견을 제사해주었다. 이제 그곳에 갈려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는 길에 비슷한 곳이라도 한 곳을 찾아 머물러주기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7층에 들러 올라선 12층은 갑판이었다. 오후 9시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훤한 낮과 같았고 그때서야 해가 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멋진 일몰을 구경하고 들어가자는 일행 분들의 성화를 못 이겨 함께 하였는데 유럽의 어느 곳에서는 일몰을 돈을 내고 보았다면서 돈을 벌었다며 환호하고 있었다. 정말 다른 곳에서 본 일몰 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마음을 부편하게 했던 일정 변경에 대한 것이 일단 마무리되었다고 보고 편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7월 29일

 

 리투아니아에는 20여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32℃ 건조한 날씨인 리가에서 역사의 중심인 구 시가지를 돌았다. 거리에 보이는 자유의 여인상은 독립운동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러시아계의 인구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곳 사람들의 월 보수는 보통 100만 원 정도, 은행원이 200만원이라고 했다. 경찰이 거의 없어 소매치기 등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외국인이 위험하다. 칼크거리의 폭이 넓은 횡단로를 건너면서 어디까지인지 어리둥절하였다. 화폐 단위인 라트는 우리 돈으로 2,200원 정도라고 했다.

 두꺼운 벽으로 세워진 건축물인 군사박물관은 그냥 놓아두었다가 일반인들에게 빌려주기도 했는데 어떤 청년들이 1루블을 내고 빌렸다가 비둘기 똥을 치우다가 거름으로 팔리는 바람에 소득을 올리는 횡재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옆 건물은 한자동맹에 참여했던 나라의 이름이 벽에 쓰여 있었다.

 룬달래에 있는 바로크 스타일의 왕의 별장은 베르사이유로 불릴 정도로 화려했던 곳이었다. 지금도 외관만 촬영이 가능하고 내부는 요금을 내고 찍도록 되어있었다. 차라리 요금을 내지 않고 포기하는 편이 훨씬 편하였다. 그렇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눈에 띄는 것 마다 찍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없어 오히려 더 피곤하기 때문이었다.

 라트비아는 라트비아인이 50%, 러시아인이 30%, 수도에는 60%가 러시아인이라서 텔레비전에 라트비아어로 자막이 나올 정도였다. 발트 3국을 모두 다 합쳐도 한국보다 작다고 했다. 자동차는 주로 수동식으로 된 것을 쓰고 있다. 9월부터 추워지는데 겨울이 6개월 여름이 6개월씩이다. 하지에는 11일몰 3일출, 동지에는 4일몰 10일출이다.

 리투아니아의 사울레이에 있는 십자가의 언덕은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자 항의를 하거나 반대를 하는 사람들을 수용하였다가 시베리아로 걸어가도록 추방되었던 사태 이후에 생사여부가 궁금하고 무사하기를 비는 기도의 의미로 꽂아두었던 작은 언덕의 십자가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이를 탱크로 밀어버리고 금지시켰으나 다음 날 아침엔 다시 세워져 있었다. 그 뒤부터는 무언의 항의로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 후 어떤 일이든지 잘되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십자가가 되었다. 결혼식을 하고 나서 꼭 들리는 장소가 되었다. 리투아니아에서 수도인 빌뉴스와 트라카이 성을 보는 일정을 십자가의 언덕으로 대체되는 바람에 일행들과 인솔자간의 알력으로 어려움을 겪은 곳이었다. 그런 결과 시굴다의 트라이다 성을 보게 되었다. 다시 리투아니아로 갔다가 일박을 하고 아침을 먹고 나서 라트비아로 들어가 트라카이성을 보고 점심을 먹고 저녁은 에스토니아에서 수도 탈렌시 구시가를 보고 게 되어있다. 세끼를 서로 다른 나라에서 식사를 하는 새로운 기억을 갖게 되었다.

 저녁식사를 거의 다 마칠 무렵 밖에서는 소나기가 무섭게 내려 다소 후덥지근하던 날씨를 잠재웠다. 잠시 머질 무렵 생수가 다 떨어져 가까이에 있는 마트에 가서 간단한 생필품을 사러가야 했다. 생각보다 생수가 싸서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와이프와 함께 로비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객실로 들어갔다.

 

 

 7월 30일

 

 리투아니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라트비아의 시굴다 트라이다성을 보고 에스토니아로 탈린 으로 가는 일정을 앞두게 되었다. 시굴다는 리투아니아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팜 흙으로 만든 붉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들이 많다. 트라이다성은 14세기에 목조로 세워졌던 것이 폴란드의 지배 시에 화재로 소실되어 20세기에 검울머리권당으로 복원이라기보다는 현대식 건축물 형태로 지었다.

 성의 내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2세기 이후 강의 남쪽은 십자군, 북쪽은 리가의 대주교가 점령하고 있었다.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세워 전쟁을 많이 했던 곳이다. 최근에는 무너진 성벽을 무대로 오페라 공연이 여름철에 열리고 있다. 강과 성 주위를 볼 수 있는 돈존 타워와 지도자였던 카우포가 나무로 축성한 성이 있었다. 옥탑 망루에서 바라본 성, 멀리 성 밖에 가우야 강이 보인다. 현제내부는 리부인들의 역사에 관한 전시물이 전시 되어있다

 또한 이곳은 스키를 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건축물들이 뾰족한 밀짚지붕이다. 봅슬레이 경기장을 설치할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주변이 낮다 보니 240m 정도인 이곳이 높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포츠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모든 것을 잊고 즐거움에 빠졌다. 점심은 리트비아에서 먹고 버스를 타고 다시 에스토니아로 향하였다. 저녁으로 접어든 탈린의 거리는 정체로 이어졌고 날씨는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 나라는 면적이 4만 5천㎢로서 인구는 120만이다. 발틱 3국 중 가장 작은 나라지만 가장 잘 사는 나라이다. IT강국, 인터넷 보급률 70%, 같은 통신사끼리는 이용료가 무효일 정도로 방전되었다. 발트 3국은 언어가 달라 소통이 불가능하여 민족성향이 각각 달라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러시아의 식민지로 살았기에 러시아어는 공동언어가 되었다.

 탈린의 좌측은 구시가로서 15세기 유적이 많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원뿔 모양의 망루 46개중 26개가 온전하게 남아있고 두께 3m 정도의 성곽 4㎞ 중 3㎞나 남아있다. 비가 내리고 있어 가이드의 안내 이야기는 각각 우산을 쓰고 다니던 일행들이 흩어져 다니다가 비가 개이고 난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래 풍경은 일품이었다. 성안에는 상가와 붉은 기와로 세워진 성당이나 주택 등 공공건축물들이 꽃처럼 수를 놓고 있었다. 젖었던 마음이 어느새 말라 활짝 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정이 끝나고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어 더욱 홀가분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민속의상을 한 종업원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 가야할 시간이 되었을 때 문제는 발생되고 말았다. 예약된 호텔이 다른 팀과 겹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못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타협중이니 맥주 집에서 한 잔 하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다시 일행이 세 팀으로 나뉘어 숙소로 이동하는데 나이든 몇 사람들은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으나 두 팀은 먼 곳으로 나가 늦은 시간까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숙소의 벽이 얇아서였는지 옆방의 젊은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다 들리니 잠을 이루지 못해 짧은 영어로 조용히 해달라고 했지만 아량 곳 하지 않고, 할 수 없이 카운터에 가서 이야기해달라고 한 뒤에 겨우 잘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받아들고 핀란드 스톡홀롬으로 이동 준비를 하느라 피곤한 몸으로 바쁘게 움직여야했다.

 

 

 7월 31일

 

 핀란드는 33만 9천 ㎢, 인구 500만명, 핼싱키는 50만명, 스웨덴에 65년 지배, 러시아에 100년 지배를 당하였다. 산업은 ① 임업 : 소나무(가구제작) 적송, 전나무(마루, 천정재료)자작나무(교소도로 주변) ② 제지업 : 핀란드 산 펄프, 작업 중 손실을 줄일 수 있어 가관을 받는다. ③조선업 : 기술집약산업, 호화유람선 등. ④ 녹기야 : 첨단사업, 핀란드 핸드폰이 품질 저하로 판매량 감소하였다.

 헬싱키에 도착하여 먼저 들린 곳은 시벨리우스공원이었다.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기념하기위해 세운 녹지 공원이었다. 파이프오르간이라도 세워 놓은 듯 굵은 파이프들이 수직으로 세워져 있고 시벨리우스 흉상이 함께 있었다.

 그곳을 나와 땡패리 아끼 교회로 이동하였다. 돌로 지붕 하반부가 세워져 있고 돔과 돌 사이에 채광을 위한 천창이 설치되어 있다. 마치 굴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반지하 처럼 아래로 내려간 바닥을 하고 돔형으로 반투명한 광선이 들어왔다. 둘레에 돌 벽으로 치장되어 일명 돌 교회라고도 한다. 넓고 밝으며 많은 좌석이 설치되었으나 십자가 장식이 적은 교회였다.

 만널헤임 거리는 핼싱키의 중심거리로서 러시아와 맞붙었을 대 피하지 않고 협상에 성공한 장군의 이름으로 붙인 거리이다. 위대한 영도력을 지닌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원로원은 러시아 지배 당시 핀란드 사람으로 구성된 원로원이었다. 핀란드어를 사용하도록 허용한 알렉산더 2세 황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국방부행사로 많은 주민들이 모여 관람을 하고 있어 잠시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스펜스키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관람하였다. 연록빛 원형 지붕의 중앙에 노란색 양파 모양의 돔으로 된 지붕과 붉은 벽돌로 어름답게 지어진 걸작으로 관광객들을 놀라게 하였다.

 까우파 또리 광장시장은 생선, 채소, 과일이 대표 특산품으로 지정되었고 밍크 ①가죽, 가방 등 러시아 문화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처럼 음식 맛을 보는 습관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개를 위한 개 공원을 만들어 자유롭게 놀도록 풀어놓을 수 있다. 바다가 1m 정도 두께로 얼면 쇄빙선을 만들어 얼음을 깨는 작업을 한다. 동지가 지난 5개우러 동안만 밤이 길다. 영하 30℃를 20일간 유지한다.

 국가경쟁력 1위인 약소 강국이다. 선박업이 발전되어있다. 사우나는 4집에 한 집 정도 설치되어있다. 사우나라는 핀란드 언어이다. 위도 48도 이상에 많은 자작나무는 산소를 많이 발생시키고 있어 이산화탄소량이 적다. 가진 자 거만하지 않고 없는 자 비굴하지 않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8월 1일

 

 러시아로 들어가 상트페테르부르그는 제정 러시아 수도였던 레닌그라드로 알려진 도시로 시내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1703년 페테르 대제가 계획적으로 새운 도시라고 볼 수 있다. 궁전을 여름 궁전과 겨울궁전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름궁전은 베르사이유 궁전을 축소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산책을 할 수 있는 거리와 1000ha에 60개의 분수가 설치되어 주로 밖에 지내는 시간이 길다. 스웨덴의 영토였는데 늪지를 필요한 도시로 만들어 바둑판식으로 정리가 되었다.

 페테르 대제는 평범한 소년으로 지내다가 러시아왕의 먼 친척이었던 그는 포병 출신이었다. 영국이나 네델란드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배워왔다. 사망 2년 전까지 완성을 못보고 살았던 곳이 여름궁전이다. 인근에 오두막집 짓고 현장에서 설계와 시공에 참여했다.

 스웨덴에 이긴 후 궁전 앞에 분수대에 사자 입을 찢는 삼손의 상을 가운데 세우고 양쪽으로 이열로 수많은 금으로 도금된 조각상이 열 지어 있었다. 분수에서 쏟아진 물은 레바강으로 모아 흐른다. 나무로 만든 건물은 습기로 썩기 쉬워 돌로 도시를 건설하였다. 다른 도시에 짓는 건축물들은 돌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돌을 세금으로 받았다. 여름에만 왕비와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궁전으로서 겨울을 위해 지어졌다. 로코코 양식을 표방한 궁전은 바르토로미오 라스트렐리가 초안을 만들었으며 연둣빛을 띄고 있다. 1,786개의 문과 1,945개의 창문이 있다. 예카테리나 1세가 첫 번째 주인이 되었다

 궁전 안에는 회화 작품을 현재 알려져 있는 바로는 가장 많이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한 에르미타쥬 미술관의 복합단지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의 일부로서 1,057개의 홀과 방이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1826년 군사 갤러리가 문을 열어 332개의 국방계 인사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겨울 궁전은 러시아 임시 정부 청사로도 쓰였다. 볼셰비키 정권의 겨울궁전 급습은 10월 혁명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피테르 3세의 부인인 에까떼리나 여제는 겨울궁전을 완성시켰다. 성격이 독살스럽고 무서워 남편을 독살 후 30년을 집권하여 마음은 주어도 몸을 주지 않는 정부를 9명, 궁남을 300여명을 거느렸던 여자였다. 아들이 독살 당하는 걸 보고도 저항 못하고 무능한 삶을 살다가 자살하였고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은 혼자 그림을 100점 이상 사서 모아 감상하다가 점점 많아져 박물관 형태의 주축이 되었다. 미로가 되어 여제 자신과 쥐만 아는 공간이라 하여 세계 최고가 되었다. 무장한 사람은 칼을 내려놓고 모자를 쓴 사람은 벗고 보게하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그림을 못보게 하고 가장 수치스럽다고 여긴 찬물을 먹었다고 한다.

 정교회 성당은 역할은 없고 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 모든 건물은 교회 보다 높이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세상을 통일시키기 위한 그리스 정교와 러시아 정교가 합쳐서 러시아 정교회가 되었다. 신부님도 결혼을 할 수 있었고 예배당에는 의자가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량내가 나는 촛불을 사용하고 촛불을 사는 값을 성금으로 여겼으며 촛불을 켠 시간만큼 기도시간을 연장해주었다.

 바실리섬은 바실리라는 사람의 소유 섬이다. 페테르는 25개 도로 중 가운데 도로를 운하로 만들려다가 시망으로 뜻을 못 이루었다. 레프딘 미술대학은 3대 대학으로 유명하다. 샤갈은 러시아 사람이지만 프랑스에서 더 유명했다. 칸딘스키는 러시아를 등지고 살았다 한다. 1시 반에서 5시 반 사이에 섬을 잇는 다리가 큰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열렸다고 한다.

 성 이삭 성당은 러시아정교로서 이삭의 날 태어난 사람의 세례명으로 받아 30살에 짓기 시작하여 70세가 되던 1858년에 완성하였다. 늪지대에 땅을 파고 400개의 돌기둥으로 물을 채워 수평을 맞추고 물을 빼어내 돌을 다져서 공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지키기 위해 천막을 내려 가리거나 지붕위에 열기구를 띄워 폭격에 충격을 완화시켰다.

 

 

8월 2일

 

 모스크바를 둘러싼 4게의 공항이 에워싸고 있다. 시내까진 1시간 정도, 낮에는 기온이 27℃정도, 임기 6년 대통령을 푸틴은 연임이 가능하다고 했다. 러시아 인구는 1억 4천 만 명, 동서로는 11시간 차이, 남북으로는 5시간 차이가 있다. 북쪽 툰드라에서 남쪽 사막지대로 이어진다. 산이 없고 평야지대, 강은 폭이 좁고 물은 석회석 성분이다. 자작나무는 국목으로 숲이 조성되어있다. 특유의 향이 나고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탄다.

 모스크바는 전 국민의 10% 거주한다. 에너지 산업국으로 33%가 천연가스, 산유국으로 수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 말 러시아는 국민소득이 1만 8천 달러, 모스크바는 2만 5천 달러였다. 100민족이상이나 되는 다민족국가라고 볼 수 있다. 몽골을 지배하고 있는데 고려인이 46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1972년도부터 토지임대가 가능하게 되었다. 러시아정교회는 1908년부터 종교의 자유는 있지만 다양성이 없다.

 아르마트거리는 아르마트가 상인이 모이는 아랍상 거리를 의미한다. 너무 일찍 이곳에 머물기에는 적합지 않았으나 크레물린 궁전에 입장이 어려워 취한 조치가 아닐까 싶었다. 4개 국어 능통했던 푸시킨이 살던 집이 있는 곳이다. 빅토르 최는 경기장에서 공연할 만큼 문화의 아니콘이었다. 라트비아 공연 후에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많은 변화를 시도한 그는 1991년 말에 아쉽게 이 세상과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추모 꽃다발이 줄을 잇고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는 팬들이다.

 크레물린은 강가의 전략적 주요지점이다, 성벽·과 함께 목책이었으나 나중에는 석벽과 벽돌 벽을 둘러쳐 도시의 나머지 부분과 구분했다. 몇몇 공국 수도는 대성당, 궁전과 주교관, 정부 청사 및 군수품 창고가 있는 크레물린 주위에 건설되었다. 모스크바 크레물린(1156)은 1620년대에 들어서 요새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했으나 1918년 이후 러시아 및 소련 정부의 중심지 구실을 했다. 원래 나무로 건설되었으나, 14세기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벽돌로 다시 만들었고 그 뒤 여러 차례 보수·개축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크렘린 자체에는 오랜 역사가 반영되어 있으며 비잔틴, 러시아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이 섞여 있다. 구조는 3각형 모양으로, 동쪽은 붉은 광장에 접해 있으며 4개의 출입구와 모스크바 강으로 난 비밀통로가 감추어진 뒷문 1개가 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모스크바 크레물린은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 본거지이자 공산주의 독재를 상징하게 되었다.

 소보르나야 광장은 크레물린 안에 가장 넓은 곳이다. 광장 둘래에 독립역사박물관, 카자가보 성당, 우스펜스키 대성당, 블라그베시첸스키 성당이 이어져 서있었다.

 바실리카 성당은 러시아 황제 이반 4세가 전승을 기념하여 봉헌한 성당으로 1555년 기공하여 1560년에 완성했다. 모스크바를 소개하는 사진마다 등장하는 성 바실리카 성당의 황금색 돔이 은은하게 그 빛깔을 내고 있었다. 동화 속 요정들이 사는 궁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만큼 양파처럼 올라간 모습이 독특한 성 바실리카의 아름다운 자태는 모스크바의 상징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러시아 황제는 이 성당을 지은 이탈리아 건축가에게 노고에 감사하나 이 땅위에 더 이상 아름다운 건축물을 다른 곳에 지을까봐 우려하여 사형을 집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호수 옆에 세워져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원으로 모스크바대공 바실리 3세가 스몰렌스크 탈환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페테르 1세의 이복형인 이반 5세와 이복누나인 소피아 공주가 페테르 1세에 대하여 음모를 실패하자 소피아 공주가 유폐당한 적이 있었다.

 그 옆에 양파모양의 돔지붕을 한 것이 스몰렌스크성당이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후 박물관으로 지정되고, 1934년부터 국립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수도원을 나와 산책을 할 수 있었던 호숫가 공원은 아름다웠다.

 아르항겔리스키 대성당은 군대의 수호성인 미하일 아르항겔을 모시기 위한 성당이었으나 역대 황제와 귀족의 유체가 안치되어 48개의 관이 성당 곳곳에 놓여있다.동쪽 성벽에 있는 스파스카야 타워의 시계탑이 보인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커다란 빌딩의 식당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나서 옥상가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시내 전경을 시원하게 내려다보았다. 일행은 마지막 코스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 스탈린 대학의 호숫가에 머물면서 대학교건축물을 바라다보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 레닌의 언덕에서 모스크바 시내의 주요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언덕 난간에 숨어있는 아담한 스몰네스크 수도원과 아쉬움의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