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사

어머님을 보내드리고 나서

어머님을 보내드리고 나서

 

  이 세상에 사랑하는 어머님을 돌아오시지 못하는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고 나서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세상이 비어 있는 듯 하여 소리가 들리는지 눈앞이 보이는지 멍멍하기만 하였다. 전 날 저녁(6월9일)에 대전 평화원 노인요양병원에서 아내와 밤 11시 반까지 있으면서 눈도 못뜨시고 말씀도 못하시면서 고통스럽게 신음소리만 내시는 어머님을 아우에게 순서를 넘기고 서울에 막차로 올라온 것이 잘못이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신 것을 보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밤 늦게 도착하여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침에 전화를 아우에게 하여 알아본 어머님은 어제 밤 처럼 그대로라는 말을 듣고 직장엘 나갔다. 마침 일학기 말 시험을 치르기 위해 문제를 내서 제출해야 하는데 초안이라도 잡아서 동료선생님께 드릴려고 종이에 적어 넘기려는 순간 아우에게서 돌아가셨다는 연락(6월10일 오후 1시))을 받았다. 임종은 커녕 소식을 전해 받고도 멀리 떨어져 있어 바로 달려가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장례를 모실 병원을 알아보고 연락할 몇 곳 단체에 연락을 했을 뿐 외가와 본가 가까이 지내던 동생이나 조카에게 알아서 전해달라고 할 뿐 정신이 없었다. 강남터미날에 나가 버스를 타고 대전 정부청사 터미날에 도착하여 다시 택시를 타고 달려가니 이미 벌써 와있는 대학친구도 있고 많은 손님들이 문상을 와있었다. 남들이 겪는 걸 보고 많은 문상을 다녀봤지만 건성이었고 직접 어머니 상을 당하고보니 실감을 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제수씨가 들어놓은 보람상조에서 나와  알지 못하는  절차나 식순을 친절히 안내하여주었고 손님들께서 몰려오실 때는 질서를 잡아주는 등 고맙기만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전에 있는 아우들이 내가 하지 못한 역할을 대신하여 분주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를 거듭해 수고 해주었다.  

 

   어머니는 영정에서 온화하신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마치 그 동안의 잘못에 대하여 모두 용서하시고 앞으로나 잘하라는 듯 편하게 살라하시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님께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시던 날 건강하시던 모습으로 기념촬영하신 사진이었다. 문상하시는 분들을 맞아 마주보며 절을 주고 받으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서울이 직장인 나의 손님들 보다는 대전에서 서구교육청에 장학사로 있는 아우와 동구교육청 장학사로 있는 제수씨 덕분에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삼성중공업에 근무하는 매제 손님들도 만만치 않았다. 자식인 우리와 함께 애를 써주어 고마웠다. 다소 소홀했던 동기간의 우애를 다시 한 번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에 가까이 지내지 않은 듯했던 친구나 친지들도 모습을 같이 하였다.

 

  둘째 날 오전 10시에 보람상조의 안내를 받아 어머님께 염을 드시는 시간을 맞았다. 이 세상을 하직하시는 순간이었다. 맏상주 입장에서 어머님의 모습을 확인 하고 이마를 짚는 순간 그 차겁게 언 느낌을 받으며 내 가슴에 전해지는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시신을 정성 다하여 모시는 그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승가시는 어머님 노자 돈으로  호주머니에 갖고 있던 걸 다드려야했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직장의 선생님들께서 찾아주셨다. 거리도 멀어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많은 분들이 오셨다. 그리고 문학단체의 문인들께서도 서로 연락을 하여 만나서 들어오셨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닌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져본다.

 대전고등학교 49회동기 국회위원인 박병석위원이 개인 조기와 대전 고등학교 동기 조기와 교능회 조기,대전중학교 동기 조기를 비롯 형제간에 많은 조기가 걸렸다. 영등포공업고등학교 최수길 교장 조화, 세계문인협회 김천우 이사장 조화, 고등학교 동기 교능회 조화, 대전중학교 동기 조화, 호서문학회 조화, 동작문인협회 조화 등을 보내주었다.  

 

  발인을 위하여 장손이 영정과 혼백을 앞장서서 준비한 선두차에 탔고 리무진 택시에 어머님과 맏상주 내외와 아버님께서 타시고 친지들은 버스를 타고 장지인 선산(대전시유성구세동 뒷산)으로 향해 가다가 사시던 아파트로 들어가 마지막을 보내시게 해드렸다. 날씨가 맑고 습기가 차지 않아 적당하였다. 선산에는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모셨는데 그 가운데 쯤 되는 위치에 어머님을 안치하기로 했다. 아버님의 친구 분들이 나와 일을 추진해주셨다.

  하관으로 부터 절차에 따라 진행되면서 다시 자식들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특히 막내 여동생은 자신의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였을 적에 고생시켜드린 것이 마음에 걸려 더욱 슬픔을 참지 못했다일행은 장례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차가 다니는 윗길로 올라갔다. 마침 평화원 근처에 있는 기사식당 주인아저씨가 보람상조에서 부탁을 받고오셔서 천막을 치고 준비를 해놓으셨다.

  다시 산소에 내려가 만들어 놓은 봉건과 주변 떼을 밟아주어야 했다. 한 사람씩 절을 청하며 수고비를 조금씩 받고 있었다. 흥을 돋구기 위해 하는 일이라며 가락을 넣어 진행하는 분도 다른 분이 아닌 식당 아저씨였다. 오늘은 어머님께서 주인공이시라 다른 산소에는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일정을 마치고 영정과 혼백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음식을 장만하여 제를 올려야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기전에 식사를 올리고 동학사를 다녀오기로했다. 사십구제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어머님께서 30여년이나 다니시던 절이라 모시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삼우제를 지내고 바로 영정과 혼백을 절에 모시기로 하고 삼우제가 끝나면 바로 절로 와서 모시는 절차를 밟자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우제를 지내러 산소에 갔을 때 잔디 떼가 모자랐는지 경사진 곳이 너무 엉성하여 걱정되었다. 지금까지 날씨는  좋았지만 앞으로 장마가 온다면  어려웁기 때문이다.

  동학사에서 스님들의 수고로 잘 모셔놓고 점심식사를 봉양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자손된 도리로 명복을 빌며 남아계신 아버님의 여생을 위하여 마음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다음날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교에 가서 기능사 시험을 봐야할 학생들을 인솔하기 위해 가보아야 할 입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야했다.  

 


어머니 생각

윤제철

가난의 가시덤불에 얽혀
5남매 밖과 안으로
여지껏 외롭게 줄달음쳐
눈물로 내리는
기쁨 하나를
흩어진 조각들 사이에
품으시는 어머니

찬 바람이 불어도
사랑이 묻은
햇살 속으로
들여다 보는 얼굴

축축하게 적셔진
내 삶이 앉아 지낼 자리,
울다울다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부러진 나뭇가지로
어둠에 휘감긴다 해도


어머니 시모음집<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 도서출판 일선기획 발간<1989년>에 게재된 시를
영정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