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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산첵-수필

옹알이

수필

 

 

옹알이

정 영 애(수필가)

 

봄날, 참 눈부시다. 올해 90세 되신 친정아버지의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친정으로 향하는 길이다. 노들강변을 지나는 차창 밖은 연둣빛 버드나무가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산들거린다. 내 마음처럼 온갖 꽃들이 깨어나 생의 환희를 합창하는 듯하다. 참 좋은 계절에 태어나 한껏 꿈을 성취하기 위해 달려오신 아버지셨다.

여유롭게 봄 향기를 즐기면서 얼마쯤 갔을까, 차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차 안에서 옆을 보니, 점점 교차로 근처로 다가가는 차들 옆으로 또 끼어든다. 벌 떼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어 웅웅대 듯 길은 아예 없어져서 모두 속수무책으로 멈춰서 있어야 했다.

금새, 여유로운 마음이 사라지고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남의 길을 막아서서 먼저 가려는 운전자들을 언제까지 속수무책으로 쳐다보아야만 하는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멈춰서고, 보드랍던 봄볕은 어느새 내 마음처럼 열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악몽 같은 이 순간이 언제 끝날지 암담하기만 했다.

?까 똑!?몽롱한 매연, 정지된 듯한 순간, 부글거리다 못해 무력감까지 드는 그때, 숨이 턱턱 막히는 승용차 안을 노크하는 외부 음이 내 귀를 울렸다. 아들이 보내온 손자의 영상이 온 것이다. 아기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쥔 채 나를 향해 무언가 웅얼웅얼 거렸다. 생긋 웃더니 다시 온 힘을 다해??하면서 내게 무슨 말인지 하고 있다.

또 다른 장면은 동요가 흘러나오자 흥이 나는지 열심히 장단을 맞추며 웅얼거리는 모습이다. 나중에는 고음을 내느라 얼굴까지 발갛게 상기된 채 몸을 흔들며 웅얼댄다. 제 딴에는 온 몸으로 노래를 하고 있는 듯 하여 그 모습에 취한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눈을 겨우 뜨고 새근거리던 아기가 그새 이렇게도 발리 사람의 몸짓을 하다니, 내 몸에 한줄기 달콤한 전율이 스친다.

?어머, 아기가 뭘 그리 찌증을 내세요. 하는 것 같아.?

나의 말에 운전하던 남편도 신기한 듯 아기의 입모양에 잠간 눈길을 준다. 답답하던 차 안에 신선한 아기의 웅얼거림이 맑은 천상의 소리를 실어 온 듯 우리 부부의 마음도 어느새 밝아져 오고 있었다. 얼마 만에 교차로를 벗어나 친정집에 도착하니, 언제나 한결같게 온화한 미소를 띠신 친정아버지 앞에 놓인 카네이션 꽃바구니가 오늘은 더 무게를 더해 온다. 친정 엄마가 안 계신 첫해라 그런지 아버지의 모습이 허전해 보인다. 케익에 91는 숫자의 촛불을 켜는 올케의 손에 모두 눈길이 모아진다. 홀로, 밤에 느닷없이 덕치는 엄마의 혼수상태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느라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수척해지신 아버지의 모습에 우리 모두 숙연해진다. 감사의 노래가 가슴 속을 적시며 감춘 눈물이 슬픔의 강물이 되어 조용히 흘러내린다. 평소에는 당신의 환자에게만 온 신경을 쓰시는 듯 무심하게 엄마를 대하는 모습만 우리에게 보이신 아버지셔서 더 마음이 에려온다.

잡채며 쑥떡이며 해산물이며 자식들이 마련한 풍성한 정성도 왠지 쓸쓸하게 여겨진다. 둘러앉아 짐짓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어도 빈 구석은 여전하다. 붓글씨도 쓰시고 정릉 산에도 다녀오시는 활력이 예전과 다름없다고 아들이 부추겨도 그저 묵묵히 듣고만 계신다.

?제가 아기 사진 보여 드릴게요.?

얼른 카톡에 있는 아기 영상을 켰다. 아기가 두 손을 앞에 모은 채 두 눈을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며 웅얼거린다. 그새 백일이 지난 증손자가 맑은 눈빛으로 종달새처럼 옹알이를 해댄다. 번뜻,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눈이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듯 환해지셨다. 아기는 그 표정에 신이 난 듯 아아아 하면서 옹알대며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러댄다.

그 순간 둘러앉아 바라보던 동생 부부도 탄성을 지르며 웃음을 터트린다. 밝고 해맑은 기운이 그 방안에 흘러넘친다. 저 마다 햇살을 한 아름 받은 기분이 든다. 이 순간, 그 어떤 선물 보다 생생한 행복을 모두에게 나눠준 것을 아기는 알까? 아기의 맑고 끼끗한 기운으로 알성에 짜든 어른들의 영혼이 씻기우는 것을, 눈부신 봄날이 다시 우리 곁을 까치발을 하고 서성인다.

입근육과 목구멍의 후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초보적인 발성을 하는 것을 옹알이라고 하는데, 아기는 옹알이를 통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언어를 습득하며, 이런 말문이 트이기 전의 언어기억은 뇌 속에 깊숙이 각인 돼 수 십 년이 지나 성인이 된 뒤 발현된다는 심리학자의 여구도 있다. 이 기억이 여든까지 간다고 한다. 되도록 고운 말의 씨앗을 아기의 기억에 심어주고 싶다.

아기의 눈과 입에서 피어나는 저 꽃의 말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눈으로 하는 말의 싹들, 두 팔을 흔들며 허공에 팔랑팔랑 흩어지는 말의 흔적들, 아기의 옹알이는 우리들 모두에게 섬처럼 멀어진 까마득한 거리를 좁혀주고 꽃 섬을 만들어 준다. 가슴이 어느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그리움의 말 꽃들이 날개를 퍼득인다.

손자의 옹알이는 내 오랜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습관을 싹 녹여주는 명약이다. 뭔가 마땅찮은 먹구름이 네 가슴에 피어날 때는 얼른 아기의 옹알이 영상을 켠다. 이내 가슴에 밝고 맑은 햇살이 따뜻이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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