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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고고학박물관을 들렸다. 이 안에 들어 있는 많은 유물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옮겨온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집트의 왕들이 미리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는 너무 어려서 왕이 되어 10년을 했지만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급히 서둘러 만들다가 보니 발굴이 어려워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되었다. 한 프랑스인은 이집트의 유물이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박물관을 지었고 앞에 무덤으로 남아 지키고 있다.
촬영을 금하고 있어 장면은 못 보여드려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미라는 백양목으로 된 목관에 넣은 다음에 화강암으로 된 석관에 넣었다. 장례는 30일간에 걸쳐 치르고 40일간 미라를 만드니 절차는 70일 걸리는 셈이었다. 미라를 만들 때 허파와 위 창자는 제거하고 심장은 심판을 받으면 무게는 단다하여 남겨두었다. 왕의 상들이 왼발을 내놓고 서서 손을 쥐고 있는 것은 정복할 수 있다는 힘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62번째 발굴한 것으로 큰 의의를 두고 있다. 25평정도 되는 작은 것이었지만 생활에 필요했던 많은 유물들이 보존되었다. 밀 빵, 샌드위치, 쇠고기, 팽이 등, 불 피우는 도구, 세너트 놀이(체스와 윷놀이를 혼합한 것) 기구, 360도를 회전 시켜 부치는 부채, 포도주 병들을 볼 수 있었다.
왕의 발바닥 판은 정복대상 민족 그림을 그려 백성에게 존경받고 신의 사랑을 받기위한 것으로 매일 받고 지낸다. 알라바스타 스톤이란 우유 빛(양초 빛)으로 깨져도 자동차 유리창처럼 작은 조각으로 떨어지지 않게 부스러진다. 망자의 침상으로 머리 부분은 사자, 재갈, 순록 모습으로 장식하였다. 각각 10일씩 침상에서 지냈는데 접는 침대, 금칠 침대 등이 있다. 미라는 목관에서 석관으로 계속하여 9겹으로 점점 커다란 관으로 쌓여있었다. 문자로는 왕이 사용하는 상형문자와 백성이 사용하는 민중문자로 구분되었는데 양 문자를 모두 번역하여 전달하는 사람은 서기관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피라미드는 모두 80여 개가 있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가장 컸지만 유물은 겨우 하나 손가락만한 상 밖에 없다고 했다. 왕의 권력이 강할수록 무덤이 크다는 말 보다는 유물을 많이 보존한 무덤이 더 강한 왕이 아닐까 싶었다.
나일강 디너 쿠르즈 순서였다. 커다란 배는 그야말로 건물 한 채와 다름이 없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어두웠다. 뷔페음식을 가져다 먹는데 분위기가 침침하였다. 창밖으로 다른 크루즈 선박이 지나치곤 하였다. 잠시 후 가수와 악단이 나와 노래와 연주를 시작하였다. 맥주 한 캔을 시켜 마시며 즐겼다.
그리고 벨리댄스를 추는 허리 굵은 여자가 나타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중국 사람들 일행 틈으로 들어가더니 뒤 따르던 카메라맨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인솔하는 아가씨가 찍지 말라고 멀리서 손짓하였다. 사진을 뽑아 사라고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사진기를 꺼내 갑판위로 올라갔다. 강변의 풍경을 찍어 볼까 싶었지만 어두워 플래시를 터트려도 잘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강바람은 차갑게 몰아치고 있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둥근 천으로 된 것을 목에나 가슴에 걸고 돌리는 남자의 재주를 보게 되었다. 땀을 흘려가면서 애를 쓰는 그를 위한 박수를 보내는 동안 이집트의 밤은 저물고 있었다.
2008.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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