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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올드 카이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추위를 이기며 피라미드를 찾았다. 쿠푸는 카이로 남서쪽에 위치한 기자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높이 146.5m(현재 137m), 저변 230m, 사면각도는 51°52'이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평균 2.5t의 돌을 230만 개나 쌓아 올렸다.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암반 밑에 설치된 매장 실에 도달하고 그 위에 왕비의 매실이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는 완성되었다.

 쿠푸의 피라미드에서 남서쪽에 쿠푸왕의 아들 카프레 피라미드가 있다. 화강암 위를 덮여 표면을 매끄럽게 했던 석회암이 일부 남아있어 본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높이 136m, 밑변 216m, 동쪽에 있는 장제전에 450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른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위치한다. 그리고 쿠푸왕의 손자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와 왕비, 혹은 왕족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피라미드 6기가 있다. 그러나 규모도 작고, 또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심하게 파괴되었다.

 나일강이 범람할 때를 대비하여 외각으로 떨어져 안전한 곳에 설치한 위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행은 낙타를 탈 기회를 얻었다. 이곳의 낙타는 단봉이어서 안장으로 두 봉처럼 만들어 탔는데 잘못 타면 넘어지기 쉽다. 다리의 관절이 두 개나 되어 두 번 꺾기 때문에 조심해야했다. 한 마리에 두 사람씩 탈 때 사진을 찍어 주고 1불씩 수고비를 주어야 했다. 피라미 주위에 멀리 하얗게 보이는 카이로 시내 모습이 보였다.

 

 올드 카이로 불리는 지역을 찾았다. 기독교의 그 오랜 흔적들을 볼 수 있는 곳이 올드 카이로다. 주변의 지역에 비해 지대가 낮다. 사막의 모래 바람이 불어오고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퇴적물들이 쌓여 지대가 높아짐에 따라 구 시가지는 낮아지는 것이다. 1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집트 고대 교회들이 있고 무슬림이 많아진 시대에도 수 만명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었다.

 이들 교회에서는 매주 수, 금, 주일 오전에는 전체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이 지역의 모든 콥틱 건축물들은 코린트 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움마이야드 왕조가 그의 적인 압바스 왕조에 패배하고 지금의 올드 카이로가 소실되었다. 현재의 올드 카이로는 이전에 바빌론이었으며, 로마 비잔틴 시대에 형성된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는 카이로 남쪽 교외에 해당한다. 교회는 진귀한 목조 아치로 유명하고, 여러 개의 성상과 금박을 아낌없이 쓴 벽의 장식 등 내부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가 바로 모세 수난교회와 그리스도 피난 교회이다.

 모세기념교회는 처음에는 알무알라카 교회의 부속건물로서 4세기에 지어져 9세기까지는 미카엘 교회, 또는 가브리엘 천사 교회로 불렸다. 이집트의 이슬람 왕조인 이븐 툴룬 왕조 ( 868 ~ 905) 때인 이집트의 제 56대 교황 (주교) 미카일 3세 때 아흐메드 이븐 툴룬이 '이븐 툴룬 모스크'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독교도들에게 금 2만 디나르의 고액의 세금을 부과하자 몇 개의 예배당을 매각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로 유대인들이 매입하여 회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알하킴 ( 996 ~ 1021) 때에 다시 파괴 되었다 

 1115년 예루살렘에서 랍비 아브라함 벤 에즈라가 방문한 이후에 재건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이 유래되었고, 당시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까닭에 아라베tm크 문양을 하고 있다. 이후 이 회당은 현대의 아랍, 이스라엘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1965년 까지 천여년 동안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집트 잔존 유대인들의 수는 100여명 정도이고 이들의 약간이 시내 중심지의 샤리아 아들리 (아들리가)에 있는 회당에서 모이고 있다.이 회당이 다시 지어진 당시에는 주위에 29개의 사원과 20개의 예배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133,000명의 무슬림들과 10.000명의 콥틱 기독교인, 42명의 유대인들이 올드 카이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종교가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공동체처럼 살았었다고 기록들은 말하고 있다. 이 자리에 세워졌던 최초의 회당 건설은 BC 350년경이며 당시의 이름은 선지자 예레미야 시나고그였다. 그러던 것이 BC 30년 경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 아랍에 의해 로마의 통치자로부터 탈환된 이 지역에 콥틱 교회에서는 새로이 예배당을 지었던 것이다.

 회당에는1890년에 발견된 퀘니자문서가 있다. 이 문서에는 11 ~ 12 세기 당시의 유태인들의 생활상이 기록되어있다. 또한 기원전 학자 에스라가 발견한 모세의 토라 (기원전 475 ~ 6세기 경) 가 발견되기도 했다. 대리석 건조물은 12세기 때의 것으로 모세의 기도 장소를 상징하고 있다. 이 건물 뒤의 계단을 내려가면 '메크바'로 불리는 900년 정도 괸 샘이 솟고 있다. 이 장소가 갖는 의미는 모세가 살았던 장소, 출애굽 때에 이집트 델타 동남부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출발장소로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 피난교회는 303년의 로마 황제 맥시밀리안 때에 순교한 서지우스와 바쿠스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며, 6월 1일은 이들의 축일이다. 길이 17m, 폭 15m, 높이 3m 의 현재 건물은 10~11세기에 재건한 것이다. 위치는 예수님 일행이 1개월간 피난 생활을 하였던 동굴 위에 지어져 있으며, 이집트의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비밀회합을 가지던 장소이다. 

 이집트 비잔틴 바실리카 양식으로서 넓은 회중석과 2개의 긴 복도(통로)를 가지고 있다. 대리석 기둥은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와서 사용하였으며 원주 부분이 검게 그을린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기둥 중의 화강암으로 된 다듬어지지 않은 돌은 가롯 유다를 지칭한다. 예수님 일행이 피난하였던 동굴은 현재 물에 잠겨 있으며, 그 들어가는 입구는 예배당 맨 왼쪽의 성소 안에 위치하고 있다.

2008.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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