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생가를 다녀와서
1.
2011년 2월 21일 아침 10시에 출발하기로 한 영공문학회 동계세미나를 원주 박경리 문학공원으로 가기로 했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별도로 뜨는 창에서 휴관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행은 두 차로 한 대는 가양동에서 한 대는 반포에서 출발하여 여주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필자는 반포에서 이상호님의 차를 타게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여주휴게소에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하였다. 관광안내소에서 여주지도를 받아 찾아보니 가까운 곳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명성황후 생가와 신륵사, 그리고 도예박물관이 있었다. 모든 회원들이 오후 6시까지는 돌아와야 했기에 시간 닿는 상황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가양동에서 출발한 차가 잠시 뒤에 도착하였다. 차를 한 잔씩 하고 밥집을 찾았다. 여주의 쌀로 차린 밥상 집을 20분쯤 걸려 들어갔다. 기름이 흐르는 쌀밥에 정갈한 토속음식이 우릴 반겨주었다. 참석회원은 김동진, 김완기, 김창수, 김희정, 이상호, 그리고 필자 모두 여섯이었다. 나머지 분들은 네 분이 개인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2.
명성황후는 조선의 26대 임금인 고종의 비로 1851(철종 2)에 태어나 1895(고종 32)까지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야했다.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다. 1866년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1871년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 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대원군과의 불화는, 대원군이 고종의 총애를 받던 궁인 이씨 소생의 완화군(完和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한 데서 시작되었다.
명성황후의 배후에는 민승호 등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 세력을 비롯해 조대비(趙大妃)를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豊壤趙氏) 세력, 대원군에게 무시된 대원군 문중 내부의 세력, 대원군 정책에 반대하는 유림세력 등 노론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대원군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대원군이 등용한 남인 중심의 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3.
1873년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탄핵한 바 있는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삼고, 그해 10월 그로 하여금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들어 탄핵하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요구하는 소(疏)를 올리게 했다. 이때 조정의 의견이 서로 달랐지만 그녀는 최익현을 감싸고,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청의 세력에 의존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한 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국내정치에서는 민씨 척족을 기용하여 세도정권을 행했으며, 일련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급진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명성황후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개화를 위해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4.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또한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에 군대를 요청하여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 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그녀를 비롯한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기울었고, 개화파에게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1884년(고종 21) 김옥균·박영효 등의 갑신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청의 도움으로 이들을 제거했다.
1885년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이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을 일으키자, 영국과 교섭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했다. 이에 청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주선하여 민씨척족 세력과 정권다툼을 벌이도록 유도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그녀는 친 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본에 대항했다.
더욱이 3국 간섭으로 일본의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자, 러시아의 힘을 과신하여 친러경향을 더욱 굳혔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조선병합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던 명성황후와 그 척족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그녀는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追冊)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민비'라는 이름은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기 전 호칭이었다. 시해된 후 고종이 황제가 되자 여기에 맞춰 황후로 격상되었다. 경기도 양주 숙릉(肅陵)에 묻혔고, 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5.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었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들으면 민비를 생각했었다. 그저 여자라는 것 때문에 연상을 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중학교 국사 시간에도 담당 선생님께서 그렇게 비유하여 말씀하신 걸로 기억되어왔다. 듣는 대로 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원군이나 명성황후를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뮤지컬을 보면서 의견을 달리 하는 부분이 생겼다.
대원군이 처남인 민승호의 소개로 이루어진 인연은 이미 계획된바가 있었다. 정적으로서 맞설 대상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민비의 기를 꺾어서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르기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고종의 사랑마저 얻지 못하고 적손이 아닌 핏줄을 세자로 내세우려는 등 잔뜩 약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기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살아남기 위한 계략을 짜내고 있었다. 결국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하여 일선에서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강국의 틈바귀에서 세련된 정책으로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의연하게 심약한 고종황제를 대신하여 애써 노력하다가 일본 자객의 칼을 맞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 명성황후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황후가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를 다녀오면서 내내 어려웠을 생활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왔을 모습과 당시에는 상상을 하지 못한 선구적인 근대 정치가로 의지를 펼칠 수 있었던 상황을 비쳐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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