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사

보고 싶은 막내 여동생

보고 싶은 막내 여동생


 신년을 맞아 새롭게 무얼 해야 할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1월 3일 토요일 새벽이었다. 잠을 자고 있었던 나는 대전 동생 셋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막내 여동생이 위독하다는 비보였다. 평소에 폐가 좋지 않아 몸이 허약했던 터라 몹시 걱정이었다. 가족은 이제 갓 스물이 된 아들 하나를 두고 외국 나가 있는 매제가 있을 뿐 아버님께서 돌봐주시곤 했었다. 매제 사업이 여의치 않아 여 동생은 결혼 전 중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지내던 경력으로 학원이며 과외교사로 아픈 몸으로 생활을 꾸려야했다.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지만 고집스럽게 정신력으로 버티고 듣질 않았다. 곱던 얼굴도 핼쑥하여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작년 6월에 돌아가신 어머님과 유난히 가까웠기에 충격은 더욱 컸던 것이다. 설득을 하지 못하고 여동생의 생각에 맡겨 두었던 것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아내와 나는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 아침을 대강 먹느라고 서둘렀지만 아침 8시 1분  차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을지대학교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건양대학교 병원으로 옮겨가서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온전하게 돌아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오후 3시가 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상태가 좋아지면 1월 5일 월요일 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동생들과 대책을 상의하고 병원에서 순번을 정하여 돌보기로 했다.

 조카아이가 식사를 걸러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여 다섯 시가 다되어 아버님을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밥이라도 사 줄 요량으로 인사를 하고 지하 식당으로 내려왔는데 어차피 늦은 것이니 함께 식사를 하게 되어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조카아이는 밥맛을 잃고 몇 수저를 뜨고 내려놓았다. 마음의 안정을 당부하고 있던 그 때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담당의사의 불길한 이야기를 들었고 중환자실 안에 간호사들이 인공호흡을 몇 명이 매달려 땀을 흘리고 있었다. 심장은 돌아왔다는데 뇌는 시간이 너무 지나 회복이 어렵다고 했다. 이미 혈압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조카아이는 엄마가 평소에 정성을 다하여 새벽기도로 읽던 천수파란경을 정성을 다해 읽어주었다. 

 침울한 분위기는 걷혀지지 않았다. 담당의사는 우리에게 장례준비를 권하고 있었다. 병원에 들어오자마자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본인이 원하지 않았다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오후 9시 25분 모든 가족이 대부분 자리를 같이한 가운데 51세를 겨우 넘기고 운명하였다. 눈물이 핑 돌며 왈칵 쏟아지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오남매 중에 가장 우수한 여건을 갖추었으면서도 여유롭지 못했던 여동생을 먼저 보내려니 그동안 돌봐주지 못한 아쉬움이 앞을 가린다. 어릴 때 자라면서도 오빠 노릇 변변치 못한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자정까지는 겨우 2시간 반 밖에 남질 않아 3일장을 하려니 내일 하루 만 모시고 발인을 해야만 했다. 조카아이는 엄마와 약속했다며 천수파란경을 7번 읽어드린다고 바븐 일정을 더디게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있는 친척들에게나 알리기로 하고 식구들끼리 상을 지키기로 하였으나 다행히 매제의 국내 고등학교나 대학교의 많은 동창들이 찾아주어 여동생의 가는 길을 외롭지 않게 돌봐주었다. 조카아이 친구들 10여명이 밤을 세워가며 지켜주는 성의를 보였다. 매제는 비행기표를 구하기 어려워 발인 날 아침에 참석할 수 있었다.

 발인식을 마치고 월평공원 근처 화장터 정수원에서 구봉산 납골당에 안치하기 위하여 미리 예약을 하고 기다렸다. 2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스님의 안내로 간단한 제를 올려주었다. 한 생애를 살아온 흔적이 항아리에 재로 남아 안치되는 순간을 맞아 가족들은 슬픔을 함께하였다.

 이제는 조카아이가 엄마를 잃고 혼자 어떻게 지내게 해주어야하는지 중요한 과제가 남았다. 해외로 나가 아빠와 같이 지내려면 군대를 먼저 다녀와야 하는데 좀처럼 군 입대할 생각이 없었다. 며칠 뒤면 다시 출국하게 될 매제와 결정을 짓기로 하고 아버님 댁에 돌아와 과일과 떡을 나누어 먹고 아들아이는 직장문제로 어제 저녁에 왔다가 발인을 보고 올라갔고 아내와 딸이 같이 올라왔다.

 아버님은 정년퇴임이후 막내 여동생과 어머님을 돌봐주시느라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으셨다. 어머님이 작년 6월에 세상을 뜨시고 막내 여동생마저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으니 몇 달 사이에 가족 둘을 잃은 것이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가 그날 운명을 하고 말다니 사람 산다는 게 너무나 허무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에 어머님 돌아가시고 첫 생신이라 가족이 모인 김에 찾아간 산소에 평소에 드리던 용돈을 놓았다가 몸이 불편하여 집으로 뒤에 찾아온 막내 여동생에게 주었더니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과 며칠 뒤에 전화로 고맙다는 인사말을 주고받던 목소리를 들은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모자라는 장례비를 형제자매 간에 나누어 부담하고 매제 쪽에서 들어온 돈은 49제를 올리는 비용과 조카아이를 위해 쓰는데 보태기로 하였다.


2009.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