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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내나라 여행 - 동부 권 - 첫째 날

 

내나라 여행 - 동부 권

 

 

첫째 날 2011년 5월 5일

 

 

1. 출발

 

 

 작년 5월 초순에 일본 북해도를 다녀왔다. 가가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을 다녀온 계기로 다른 인식의 싹이 터 올라 금년에도 다른 지역을 꼭 다녀오겠다는 마음의 다짐이 동북부의 대지진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방사능의 피해가 염려스러워 더욱 그랬다.

 그러던 차에 직장 동료가 신문에서 내나라 여행에 관한 광고를 가져왔다. 동부권, 서부권, 남부 한려수도권등으로 나누어진 일정을 읽어보고 동부권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본이 아니면 중국이라도 다녀오자고 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우리에게 하나투어에서 개발한 내나라 여행은 마음을 여지없이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예약을 먼저 하고보자는 욕심으로 잡아놓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막차를 탄 것이었다. 대기자까지 생기는 마당이었다. 접수자의 이야기로는 나이순으로 좌석배치를 한다는데 거의 마지막 뒷자리에 앉아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5월 5월에서 5월 8일까지 3박 4일 일정이었다.

 대금은 다소 비싼 듯했지만 좋은 호텔에, 좋은 리무진차에, 좋은 음식으로 즐겁게 해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평소에 자보지 못한 유명 호텔에서 자보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2. 첫째 날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어린 아이도 없고 이젠 60이 다 넘은 부부가 어떻게 일상에서 벗어나 편히 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방법 중에 하나로 별러온 것이어서 설레는 것은 왜일까? 압구정역 옆 현대백화점에 공영주차장에서 오전 8시 반에 출발하니 시간을 맞추어 달라고 했다.

 아침 날씨가 쌀쌀하여 백화점 입구 지하에 내려가 앉아 있었는데 김호진 가이드한테 전화가 왔다. 차가 도착되었으니 서둘러 올라오라고 하였다. 이미 종각역에서 많은 분들이 타고 계셨다. 맨 뒤 위 좌석은 아이 둘을 데리고 온 가족이 타고 있었다.

 

 

① 진주성(晋州城), 촉석루(矗石樓)

 

 

 

 

 

 

 

 

 

 진주시를 행해 달려가는 버스는 식사를 위해 식당 앞에 섰다. 전주비빔밥에 비유하여 진주밥상이었다. 빈자리에 앉고 보니 네 사람씩 앉아야 되는데 앞자리 두 자리엔 끝내 앉지 않아 반찬을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반찬 종류가 많아 푸짐하여 입맛을 돋우었고 먹기 전에 배가 부른 듯하였다.

 진주성(晋州城)은 김시민 장군의 의병 5천과 민간인 6만이 왜군 10만과 맞선 역사적 장소였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손꼽혔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촉석루는 조선 장군의 아내인 논개는 기생신분이 아니면 남편의 복수를 할 수 없게 되자 기생을 가장하여 들어가서 왜장을 부여안고 푸른 남강에 뛰어들었던 곳이다.

 진주성 문을 들어가서 가까이 김시만 장군상이 서있었고, 성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날을 즐기고 있었다. 귓전에 들리는 일본어나 중국어가 관광객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촉석루(矗石樓)에 올라가니 남강이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한다.) 그리고 논개가 왜장을 강물에 쌍가락지를 끼고 부여안은 채 뛰어든 바위돌이 보였다. 남강 위에 놓인 교량난간에는 이를 기리기 위해 반지 모양을 한 난간을 설치하였다.

 의기사(義妓祠)는 논개의 사당이다. 전신이 그려진 초상화와 함께 모셔져 있다. 사진을 찍었으나 유리면이 반사되어 울타리 기와모습이 비쳐 보인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 지역 부인들의 모습을 참작하여 작성되지 않았을까 짐작이 된다.

 

 

②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전쟁과 포로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민족전쟁의 아픔,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는 역사를 알려주는 산 교육장이다. 만남의 공간, 프리쇼 공간, 한국전쟁 공간, 포로수용소 공간, 포로수용소 유적 공간으로 나누어져 전시되고 있다.

 전쟁 초기에 생포되는 포로들은 대부분 강제로 의용군에 동원되었다. 포로수용소의 문제는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대전이나 대구의 수용소에 포로들을 부산으로 이송하면서 팽창되어 거제로 옮겨야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포로 수는 증가하였으나 이들은 어떤 조치를 당할지 불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수용 공간과 시설을 확보해야 할 문제, 포로를 경비하는데 필요한 상당한 인력이 소요되는 문제와 안전성 문제,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할 문제가 대두되었다.

 수용소의 소요는 경비병과 북한 포로 사이에 사소한 시비로 충돌이 발생하였으나 개인적, 감정적으로 우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크게 대두된 것은 경비병과 북한 포로의 대우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미군 당국은 제네바협정을 준수한다는 측면에서 제지나 규제할 수 있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많은 숫자의 포로들은 조직을 만들고 구호를 외치거나 시위를 하는 일까지 생겼다. 경비병들은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어서 사실상 포로 관리에 대한 실권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로 드러났다

그들은 위생 검사와 급식 문제가 발단이 되어 포로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답변에 .포로들은 식사를 치우기 위해 수용소 안으로 들어간 작업반을 향해 돌을 던져서 미군 장교와 사병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계속해서 포로들이 함성을 지르며 문을 향해 돌진하여 이에 대항해서 경비병들이 사격을 하였다.

 많은 포로들이 북한 또는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는 뜻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포로들 간에 친공과 반공의 편갈림이 생기면서 양자 간의 마찰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친공포로의 활동이 처음부터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었던 반면, 반공포로의 활동은 자기 보호를 위한 자구책의 방편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렇게 해서 수용소 내부는 소요와 난투극의 마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런 실정을 보고 받고 현지를 시찰한 밴플리트 장군은 포로수용소 경비병력을 더 보내도록 해서, 1951년 말에는 9,500명이나 되는 관리 요원이 거제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수용소에서 요구했던 규모보다는 6천명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어느 한 편이 상대에게 전면 항복하지 않는 한 구역 내의 패권 싸움, 예를 들면 구타, 사형(私刑), 인민재판과 이것들을 제지하거나 보복하려고 하는 폭력 행위 등은 그칠 수가 없었다

 해방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움직인 자는 북한 공산군 전사 출신이라고 알려진 홍철인데 배후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한 사람으로 이학구 총좌가 있었다. 그는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제2군단 작전참모였고, 낙동강전선에서는 제13사단 참모장으로서 1950년 9월 21일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으로 투항해 온 사람이었다.

 수용소 안이 온통 친공포로들의 광란장소로 변하여도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은 그냥 보고만 있는 자세였다. 휴전이 성립되는 대로 포로들을 송환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소장으로 부임한 이후로 돗드준장은 수용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포로 지휘자들과 대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그 면담을 마치고 떠나기 위해서 막 돌아섰을 때, 별안간 포로들이 그를 에워싼 채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밴플리트 장군은 포로들의 불합리한 요구엔 응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그러나 콜슨 수용소장은 포로들의 요구사항에 대한 수락의 내용을 담은 각서를 보냈다. 이 각서는 3차에 걸쳐 포로들의 구미에 맞도록 수정되어 그들에게 넘겨지자 풀어주었는데 포로가 된지3일 만이었다. 이 사건은 종래의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은 포로수용소 안에까지 전쟁을 확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③거가대교

 

 

 거가대교(巨加大橋)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에서 가덕도를 거쳐 거제시 장목면을 잇는 다리이다. 2010년 12월 14일에 개통되었으며, 총길이 3.5km의 2개의 사장교 와 3.7km의 침매터널, 1km의 육상터널로 이루어져 총 길이는 8.2km에 달한다. 도시고속도로인 거가대로를 구성한다. 거가대교를 포함한 거가대로 개통으로 부산~거제(부산 사상시외버스터미널~거제 고현터미널) 간 통행거리는 기존 140㎞에서 60㎞로, 통행시간은 기존 130분에서 50분으로 단축되었다.

 사장교(cable stayed bridge)란 최근 가장 많이 가설되는 장대교로서 외관상으로 보아 현수교와 유사하지만 케이블이 주형에 연결되어 직접 주형을 지탱하는 형식으로 연속 트러스교 또는 아치교에서는그 경간이 장대해지면 사하중이 급격히 증가하므로 사하중을 경감하기 위하여 고안되었으며 경간 150∼400m 정도 범위의 도로교에 흔히 쓰이며, 경제적이고 미관이 우수하여 짧은 보도교에도 조형적(造形的)인 효과로 적용하고 있다.

 대전-통영, 대구-부산고속도로와 연결되어 남해, 경부고속도로의 교통량이 분산될 것으로 기대된다.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부산과 거제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영, 고성 등을 포함한 10개 지역(인구 673만명)이 부산광역경제권에 묶이게 됐다.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침매터널(해저터널: Immersed Tunnel)과 2주탑과 3주탑이 연속되는 사장교이다. 왕복 4차로에 총 길이는 8.204km로, 사장교 3.5km, 침매터널 3.7km, 육상터널 1km로 구성되어 있다.

 

 

④동백섬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남해안에는 동백섬이란 이름을 가진 섬들이 많다. 현재 부산 해운대구의 해안대도 일반 명칭은 동백섬으로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섬의 이름이 되었다. 해운대는 원래 섬이었으나, 육지에 가까이 있어 흐르는 물에 흙, 모래, 자갈 등이 내려와 쌓이면서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이다. 군사보호지역이므로 해안의 모든 절경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인어상이 있는 해운대 바닷가쪽 암반과 절경이 눈에 뜨인다.

 누리마루 에이펙 회의장은 개장을 했다가 시간이 지나 마감되었다. 아시아 정상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던 장소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 보존되어있는 회의실 내부를 봤던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서족 깊숙이 내려선 해가 역광으로 버티어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다소 지체되어 볼 수 없을까 염려하였지만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다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현재 동백섬 주위에는 동백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고, 섬의 중앙에는 최치원의 동상과 기념비가 서 있다. 해운대 동백섬은 최치원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유적지이며, 예로부터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나 유명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였다. 해송의 울창함과 바다구름의 어우러짐은 찾는 이들에게 안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⑤파라다이스 호텔

 

 

 

 

 

 

 

 

 

 

 

 저녁식사를「복집」에서 하고나서 파라다이스 호텔에 들어갔다. 노천온천 및 옥외수영장 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9시반이전에 입장해야한다. 해운대 백사장을 산책하며 예전에 다녀갔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호텔 해운대편 정원에 분수가 어두운 밤의 조명을 받아 활기차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넓었던 백사장은 많은 고층 빌딩으로 잠식되어 좁아져 있었다. 따뜻한 낮의 기온 보다는 다소 쌀쌀한 느낌이었다.

 노천 온천은 수영장과 함께 있었다.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큰 규모는 아니었다. 뒤 따라 온 아내와 함께 따뜻한 물에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일행 중에 온천장에 나오신 분은 자매를 데리고 온 젊은 아줌마 밖에 없었다. 몸이 풀렸다 싶은 시간 쯤 일어나 샤워를 하고 객실로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온도를 조금 올리고 잠을 청했다. 페키지 여행의 수준을 뛰어넘는 하나투어의 명품관광을 잘 선택한 것 같다. 마치 외국여행을 즐기는 듯 못지않았다. 깨끗하고 잘 정돈된 공간이 마음에 흡족하였다. 오히려 유럽이나 호주, 뉴질랜드 보다 뒤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