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상하이)에서 남경(난징)까지 - 1
1.출발
2011년 1월 5일 아침 7시 반까지 인천공항 3층 L카운터에서 만나기로 한 일행들이 10분쯤 늦게 나타난 필자를 반겨주었다. 이수역에서 10분쯤 지연한 공항버스 때문에 늦어진 것이다. 서둘러서 화물을 붙이고 출국수속을 밟았다. 별 탈 없이 마치고나서 돌아서보니 일행 중 한분이 사진대조에서 문제가 생겨 확인한 결과 사진의 질이 좋지 않아 잘 확인이 도지 않았던 것이다.
라운지에 올라가 호산엔지니어링 정병일 사장이 일찍 나오느라 아침식사를 못한 우리들에게 아침을 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여행을 주선하고 모든 일정을 맡아준 고마운 일을 자처하고 나섰다. 게이트로 가서 비행기 9시 반에 아시아나 OZ361기 36F 자리에 앉아 한 시간 반을 날아야 한다. 비행기에서 점심식사가 나왔다.
상해 푸동 공항에 착륙한 것은 오전 11시쯤이었다. 12인승 승합차가 김태주 가이드와 함께 대기하였고 남경을 가기위한 고속열차를 탑승하기 위해 상해 역으로 오전 11시 반쯤 도착하였다. 점심시간이 아침식사가 한 것이 그득하여 늦추어 춘천 막국수를 간단히 하기로 했다. 열차시간이 예정 보다 늦어져 여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고속열차 역은 공항을 능가할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고 기다리는 승객이 가득하였다. 남경에 갈 때는 일반행을 타고 2시간이상 타고, 상해로 돌아 올 때 직행은 75분정도 걸린다고 했다. 열차는 최고속도를 318km정도 내고 있었다. 밖으로 내다보이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넓은 땅을 지니고 사는 중국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뿌연 안개가 하루 종일 내려앉았고 차가운 날씨는 예상한 것 보다 추웠다. 열차에서 내려 화장실을 갈 때는 동전으로 10위웬을 내야 소변을 볼 수 있고 나올 때는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고 했다.
2.남경
숙소(金太隆國際酒店-JIN TAI LONG INTERNATIONAL HOTEL)로 들어가 방을 6412호(4층)로 배정받았다. 필자는 핸드폰을 로밍을 하지 않았고 시간을 TV로 보기로 하였다. 잠시 쉬었다가 로비에 모여 호텔 앞에 보이는 현지식당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각 실에 한 사람이 사용하기로 하여 나올 때는 옆 실에 들르거나 밖에서 불러서 같이 내려오기로 했다.
콩가루 미숫가루도 아니고 두유도 아닌 맛으로 유리컵에 따라주는 음료를 마시고 52도 즘 되는 술을 아주 작은 잔에 따라주며 마셨는데 얼마만큼 마시고 남길까 했더니 쩨쩨하다는 말에 한 병을 비우기로 했다. 일곱 분 중에 두 분만 마시지 않고 다섯 분이 마셨기 때문에 적당하였다. 무리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일행은 개구리 뒷다리나, 오리의 목젖 등 보기 드문 음식을 맛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발마사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와 다른 한 분은 독실에 들어오고 다른 세분은 한 실에 들었다. 그런데 같은 마사지로 결정이 안 되었는지 물어보는 걸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고민했는데 옆방에 일행이 같은 걸로 하자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엎드려서 받는 마사지는 발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어설프게 의견을 말했더니 발마시지를 더해준다고 했다. 옆방에도 같이 하는 걸로 말을 하라했더니 그런다고 했다. 조금 지나 일행들이 올라와 왜 안 나오느냐고 하여 당황하였다. 하다말고 나갈 수는 없어 다하고 나갔더니 옆방에서 같이 하기로 한 분도 사람이 와서 한 이야기를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나왔다고 했다. 더한 시간 삼십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시간이 빨리 가버렸는지 숙소에 들었을 때 시간은 어느새 10시 반쯤 되었다.
아침식사는 호텔 뷔페로 오전 7시 반에 이루어졌다. 식사를 마치면서 각 실에 들러 짐을 챙기고 오전 9시에 체크아웃하고 승합차로 중산공원을 관람하기로 했다. 한참을 달려 공원입구에 도착하여 셔틀차를 타고 들어갔다. 날씨가 너무 추워 찻집에 들러 몸을 녹이기로 했다. 내부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나서 공원입구에 서있는 돌 기념대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였다. 중산공원에 대한 안내문을 읽고 있는 사이 필자와 다른 한 분 그리고 가이드 만 있을 뿐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관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뒤를 따라 가기로 하였다. 중산은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손문의 다른 이름이다. 신해혁명 때 원세개와 타협하여 광범위한 철도 시설을 꾀하였다. 그 후 제2혁명 때 원세개와 다시 충돌하여 일본으로 망명하고, 거기서 중화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원세개가 사망하자 귀국하여 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하였다.
1921년 광둥 정부를 수립, 정무 총재에 취임하고, 1924년 제1차 국공 합작에 성공하여 당 조직을 개편하였다. 또 삼민주의를 발표·제창하고, 전국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북벌군을 편성, 베이핑(北平)에 침입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고 객사하였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많은 계단을 올라야 능에 이를 수가 있다. 능이 있는 곳에 올라가려면 동상이 세워진 앞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난간 아래로 그의 모습을 만들어 관 위에 뉘어놓고 관 안에 시신을 모시고 있다 한다.
입구 쪽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티베트 학생들이 관광을 하러 막 도착하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중국과의 마찰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중산의 정신을 알고 있는 듯이 다르게 보였다. 앞장서 갔으려니 생각했던 일행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날씨 핑계를 대고 찻집 주변을 맴돌며 가계를 구경하고 있었다.
점심때가 어느새 우리를 시장하게 하고 있었다. 남경의 식당가를 산책하며 마땅한 곳을 찾았다. 하천을 끼고 거리가 구성되었다. 물위에 배를 띄워 그 안에 식탁을 놓아 손님을 모실 수 있게 되어있으나 겨울엔 그림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곳 식당들은 같은 음식이라도 이름이 달라 주문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걸 보았다. 중국 현지 음식들은 코스로 조금씩 나오는 것이 특색이었다. 먹어보지 않은 음식으로 골라 맛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행은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으로 안내되었다. 공자의 상을 앞에 세워놓고 뒤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자의 영정이 더욱 인자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인과 예를 가르쳤던 인류의 스승이셨던 분이 아니시던가, 커다란 향을 구해 불을 붙여 소원을 빌었다. 연기가 많았고 금가루가 날리어 옷에 묻었다.
다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던 삼십만 대학살의 현장을 찾았다. 동상으로 만들어 놓은 처참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물어리게 하는 장면은 숨진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있는 어린 동생을 바라다보며 우는 형의 모습이었다. 넓은 자갈마당 아래 학살이 자행되었고 옆에 매장된 그들의 빼가 쌓여있는 모습을 눈시울이 뜨겁게 내려다보았다. 가장 무서운 사람이 일본사람들이라는 걸 익히 잘 아는 우리의 일제치하로 어림짐작이 되어 민족감정이 아직도 민족의 가슴에 남아있지 않은가, 그들의 이름이 매몰현장 옆 울타리 벽에 나열되어있었다. 그곳을 나와 세워진 평화의 공원이 여신상의 횃불에서 빛나고 있었다.
莫僽湖 공원에 들렀다. 그곳에는 호숫가에 바둑을 두던 옛사람들의 모습이 세워져 있고 기념품가게에서는 목걸이를 만드는 옥돌 자료가 조그만 봉투에 담아 팔리고 있었다. 깎아서 사겠다는 심리가 끌려 재미를 보았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호수는 하나의 바탕일 뿐이었다.
들어서는 입구를 나오면서 다시 만났다. 새를 파는 사람들이 새장을 나뭇가지에 매달아놓고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이곳 중국에서는 겨울나무 밑을 희게 칠을 하여 병충해를 막는다고 했다. 철저히 관리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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