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진 아이누족 문화
없어진 아이누족 문화
인간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내려온 신들이 살다가 죽으면 다시 신으로 돌아간다는 아이누족 문화가 북해도 일대에 퍼져 140년 전까지 유지해왔다. 얼굴이 희고 털이 많은 외모로 생활여건상 자손이 귀했던 그들의 슬프고도 어두운 민속공연을 보았다. 멸족해가는 상황에서 없어진 문화를 유지시키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연어였다. 집안 중도리에 매달아 건조시킨 것을 자랑삼아 매달아 놓았다. 모습은 있는 그대로였다. 말라비틀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린내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어둡고 침침한 실내에서 눈에 띄지도 않았다.
일제 강정기를 보냈던 당시 우리 이름을 빼앗고 문화를 말살시키려던 것을 막아낼 수 있었던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리 남의 것이 좋아 즐길 수 있다 하더라도 민족이 있으되 우리 문화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어두운 의문을 되씹게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오래도록 간직할 일이다.
노보리베츠 지옥계곡
오래전 화산이 터진 분화구 안에서 유황냄새를 풍기며 덕지덕지 앉은 딱지들의 아물지 않은 틈을 비집고 아직도 뜨거운 열이 땅속 깊은 속에서 마그마로 끓어올라 뜨거운 물결을 뿜어 올린다. 넘친 뜨거운 물은 개천을 이루고 김을 피워대며 흘러내렸다. 백두산 천지 아래 장백폭포 아래 온천수가 김을 내며 흐르던 모습을 떠올리며 바라다보았다.
앞을 가리는 수증기는 눈과 코를 막고 얼굴을 찌고 있었다. 길의 끝에 우물처럼 테두리를 해놓은 그 안에 끓는 물의 우렁찬 외침으로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 살아온 생활을 평가받는 그 계곡에서 처형도구를 달구는 현장으로 다가왔고 도깨비는 불호령이 떨어질 순간을 대비하여 내 곁을 옹호하는 유일한 내편이었다. 잘못을 많이 저지른 탓일까? 잘 생긴 염라대왕의 모습이 두렵기만 했다.
오타루 베네치아 유리제품 전시장
오타루운하는 작은 항구와 좁은 언덕길, 평온하게 흐르는 옛 운하를 따라 늘어선 88개의 가스등과 작은 상점들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이 화려했던 역사와 로맨틱한 정취가 넘실거리는 도시 오타루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뿐만 아니라 운하를 따라 걷다보면 화가들의 그림들이 소품으로 전시되어 구경을 하며 지나칠 수 있다.
기타이치가라스공방 거리는 사가이마치도리(堺町通り)에 위치하고 있으며, 1891년 석유램프를 제조하기 위해 시작해 오늘날 오타루의 특산품이 된 유리제품을 10만 종류 이상 진열, 판매 하고 있는 곳으로 여성분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얇고 투명한 곡면의 유리제품은 조명과 함께 생명체로 움직이는 듯 했다. 유리로 전구를 만드는 작업 장면을 남자가 아닌 여자의 숙련된 기술을 볼 수 있어 놀라왔다.
인근의 오르골 전시장은 아기자기한 오르골은 화려한 장식제품 안에 멜로디를 설치하여 들을 수 있도록 만든 상품과 다양한 기념품등을 전시, 판매하고 있으며 여성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인기가 있는 상가였다.
오르골 전시장을 돌아 나와 르네상스 양식의 전시장을 잠시 들러 아이스크림 맛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눈앞에 드러난 유리 제품들은 공을 들여 만든 작품성 있는 물건들이 생명을 얻은 듯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작고 앙증맞은 녹색 개구리는 팔을 끼고 놀자는 기세로 점프하려 숨을 할딱였고, 걱정꺼리 없는 부엉이가 잠든 목걸이는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듯 편안한 모습이 부럽기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작은 색깔 구슬을 반구형 안에 정밀한 공법으로 쌓아 입체감이 살아나왔다.
작은 공간 안에 창조한 생명체가 영롱한 자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점원 아가씨의 제지로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문화의 깊이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닐까? 다른 매장 단순한 생활도구에서도 유리종소리가 들려오지만 다만 청각에 지나지 않는데 이곳에 제품들은 마음속 깊은 곳을 흔들어놓는 공법을 고안해낸 성과를 뽐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분야라도 그 물건들이 일본 어느 곳에서 볼 수 없는 독보적 존재의 자부심이 얹혔다는 것이 무엇보다 바람직하게 보였다.
북해도 청사의 교훈
구북해도 청사는 북해도 개척의 역사가 담겨 있는 붉은 벽돌의 중후한 건물로서 약 250만개의 벽돌을 사용하여 미국풍 네오바르크 양식으로 1888년 건설되었다. 당시 사용했던 생활용품이나 특산품을 전시하였고 역사적 기록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러시아에 귀속된 섬들을 반환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의 영토였던 근거하에 가능성이 있던 없던 찾으려는 그들의 정신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네 것이 아닌 독도를 탐내는 일면도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우리 영토가 분명한 간도지방을 슬그머니 점령한 중국에게 반환을 요구하는 정신은 후손들에게 이어 주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너무 쉽게 포기하고 마는 것은 아닌지 나에게 묻고 있었다.
오오도리 공원의 낭만
북해도 개척 당시 상징물 중에 하나로 현재까지 작동하는 것 중 일본 최고령인 시계탑 주변을 관광하였다. 일행은 지하도로 내려가 상가거리를 관람하러 간 사이 필자는 아내와 함께 메이지14년인 1881년 부설되었다는 탑 위로 올라가 삿포로 시가를 내려다보았다.
한국에서 온 다른 관광사에서 가이드가 안내하여 설명을 해주는 걸 틈에 끼어 들어주었다. 사포로 동계올림픽을 열었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로공원의 저편 끝을 바라다보았다. 도시계획이 바둑판처럼 이루어진 시가는 질서정연하였다.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바람도 불고 비도 가끔씩 뿌렸다. 오오도리공원은 삿포로시 중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심 속에 펼쳐진 시민공원이다, 여러 행사가 열리는 삿포로시민들의 쉼터이자 문화공간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겨울에는 얼음축제를 여는 곳이 바로 이 공원이라 한다. 화단과 분수가 어우러져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분수의 물이 키가 낮아져 가부러졌다가 일어섰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공원 아래 바람은 나의 모자를 벗기려 애썼지만 손으로 누르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지하도 상가로 내려가 풍경을 보고 싶었다. 대낮같이 밝은 지하는 많은 상품을 진열한 상가가 줄 서있었다. 고객들 사이에 보일까 기대한 일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잘 장식된 벽을 바탕으로 아내를 디카에 담고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잘못 나가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미 버스엔 일행들이 우리를 마지막으로 모두 승차하였다. 1분을 초과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