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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주름 윤 제 철 시간은 사람의 얼굴에 강물로 흐른다 풍부하던 수량을 자랑하다가 가뭄으로 말라 갈라지던 수난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던 바닥은 떨어지지 않는 반창고를 붙이고 산다 시간은 밀물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수면의 높이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머물었다가는 동안 자국을 남기고 간다 딱지처럼 덕지덕지 앉기도 하지만 골이 패여 벌어진 굴곡진 상처가 된다 더보기
새해 문전에서 새해 문전에서 윤 제 철 오늘이 나에게 다가오기까지 수많은 오늘을 어제로 보내고 나서 과거라는 이름으로 버려놓고 이제 한 해를 한꺼번에 외면하려한다 하루의 상자들이 뒤죽박죽 쌓여 구분되지 않은 시간들은 허허실실을 따져보다가 답도 없이 레일 위에 실려 떠밀려간다 더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이 포장된 시간의 허울을 쓰고 그저 새로 만든 하루를 받으려 새해 문전에서 서성인다 오늘을 내가 가지고 노는 건지 내가 오늘에 끌려가는 건지 후회와 각오가 교차하는 시각 무언가 달라지길 바라는 출발점이다 더보기
지지 않는 꽃 지지 않는 꽃 윤 제 철 물기가 없는 꽃이 살아있다 뽀송뽀송 시들지도 않고 언제나 방긋 말을 붙인다 사들고 온 사람이 하는 말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화분에 물을 주고 양지 바른 창가의 햇살을 비춘다 냄새가 향긋하지 않아도 어려울 때 의지하게 하는 야릇한 힘을 꽂아주고 떠나지 않아서 좋은 이미지가 가슴에 살아 나를 지킨다 더보기
돌아올 수 없는 길 - 故 채수영 시인을 추모하며 돌아올 수 없는 길 - 고 채수영 시인을 추모하며 윤 제 철 함께한다는 것은 인연의 시작이다. 자주 접촉한다는 데서 공유하는 생각들로 인하여 믿음이 생겼고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그러한 의지가 함께 하지 않아도 하던 일에 관심을 놓지 않음에서 끊이지 않고 연결된 고리가 되었다. 채수영 시인은 이야기의 서두처럼 그렇게 지내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우리 곁을 떠났다. 큰 수술을 받았을 때도 병원에 갔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타협을 피해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려고 애를 썼었다. 모두에게 그렇게 보였는지 몰라도 겉으론 그랬어도 속정이 두터운 어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흥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였고,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였던 그는「문학세계」가 월간 종합문예지로 창간되어 뿌리를 내려 가던 초.. 더보기
빈자리 - 이덕주를 추모하며 빈자리 - 이덕주를 추모하며 윤 제 철 시 비평집「톱날과 아가미」에서 세상을 향해 외치던 말들이 아직도 가슴에 살아 용솟음치는데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면서 아무 연락 없이 가버린 덕주야 나는 너로 하여 나를 바라보는 혜안(慧眼)을 주었지만 아직 난 너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으니 빚을 못 갚는 빚쟁이로 남았다 언제나 모이면 왔냐며 잡아주던 손 이제는 이 잡듯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같은 길을 걸었다는 빌미로 난해한 시어(詩語)들이나 던졌던 부담이 메아리로 돌아와 아프게 파고든다 색이 바라지 않는 사진처럼 나의 앨범에 꽂아두고 간직하려 하지만 빈자리가 이렇게 휑할 수가 없다 더보기
붉은 잎새 붉은 잎새 붉은 빛깔로 가지에 붙어 바람이 만들었을망정 아직 뛰고 있음을 고마워할 줄 아는 심장이다 떼버리지 않고 꼭 잡아 사랑이 따사롭다며 하늘처럼 의지하는 바람은 믿지 마라 이별을 재촉한다 붙어있고 없음은 사랑이 이별로 바뀌고 가을을 겨울로 옮겨놓는 거대한 역사의 전환이다 더보기
맛 윤 제 철 홍당무 쓸어라 하면 쓸고 무나 양파가 필요 하면 또 다시 얼 만큼 쓸어놓는다 무얼 하는지 몰라도 냄비에 넣으라면 넣고 멸치우린 물을 붓거나 푸라이팬에 올려놓고 가열한다 하라는 대로 하다보면 음식이 되어 식탁에 올라온다 나는 그냥 칼로 잘라줄 뿐 양념이 무언지 몰라도 아내의 팔을 도와서 만든 것들이 맛을 내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더보기
커피 한잔 커피 한잔 햇살 좋은 베란다에서 한 잔의 커피는 달팽이 기어가듯 느릿하게 커피 잔 그림자를 흘리며 일상의 부딪침으로 망가진 좁아진 시야를 넓혀주거나 닫혀버린 감각의 문을 열어주고 뒤도 안보고 사라진다 좋다 나쁘다 말은 많아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연락 없이도 만나주는 친구 변덕스런 나를 외면하지 않는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