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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창작시

섭지코지 섭지코지 윤 제 철 누구를 만나러 가는 행렬일까 늘어서 가는 줄이 끊이질 않았다 바닷가 벼랑 위 묻어둔 기억이나 동화 속 케이크 집에서 꿈꾸던 것들이 현실이 되길 바란 그 시절 유채꽃 미소를 놓치지 않으려 가파른 해안 아래 검게 그을린 바위들의 이야기로부터 염원들이 수북이 쌓인 돌탑에 담아놓은 속삭임까지 말상대로 거부하지 않고 바쁘기만 하다 어느 것 하나라도 빠트릴 수 없는 추억 안에 상대를 찾고 있다 더보기
과도(果刀) 과도(果刀) 여행 내내 쓰다 캐리어에 못 담은 채 공항 보안검색에 걸린 과도(果刀) 잊은 게 화나고 다시 가는 게 귀찮아 파리처럼 목숨을 짓밟으려 했다 아내 직장동료가 맺어줘 함께한 인연 무려 40여년 남한테 듣는 싫은 소리 언짢아했으면서 그에게 처신한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아내의 오래 쓴 애착과 담당자의 설득으로 다시 부치고 나서 냉정과 잔인 사이 밀려오는 미안함에 시달렸다 더보기
용머리해안 용머리해안 윤 제 철 바람이 불어왔다 파도에 밀린 바람이 바위를 밀고 있다 밀리다가 버티다가 긁힌 자리는 바람을 닮았다 희노애락의 표정으로 바람을 맞으며 용처럼 우리를 바라본다 파인자국이 닳고 닳아 물결이 되고 세월이 실린 모습을 그렸다 거센 풍랑으로 안긴 슬픈 가족사로 흘린 눈물마저 한몫을 하고 코로나로 거리두기를 하더라도 자신을 위한 안전을 바라며 해안을 순례한다 더보기
꿈 매일 내 앞에 기다리는 계단 어느 곳마다 하나하나를 딛고 오르다 얼마나 왔는지 모르고 늘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다 지나간 건 지난대로 다가올 것만을 기대하며 소중하게 간직하려했다 희망이나 꿈은 가슴 안에서 뜨겁게 달구어 녹은 유리 액이나 쇳물로 만들고 싶은 형상의 틀에 채워 넣고 찍어내는 줄 알았다 오늘이란 이름의 계단을 딛고 내일이란 계단을 오르며 애태우는 꿈은 녹지 않고 어떤 형태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과정을 거쳐야만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 희망이나 꿈은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형체일 뿐 보이지 않았다 더보기
농한기(農閑期) 농한기(農閑期) 윤제철 겨울 한철 농한기 나돌지 못했던 논밭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농한기를 맞고 추위가 오고 눈이 쌓여 밖에 못나갔던 불편도 아닌 허공을 떠도는 공포는 긴 시간을 접지 않고 사계절이 다가도록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발걸음들이 얼어붙어 집에 갇혀 녹을 줄 모르고 의지하고 살던 호흡들이 보이지 않게 허물어지고 불투명한 그들의 거동을 알 수 없는 가운데 만만한 아스트라제네카에게 구호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더보기
심다공증(心多孔症) 심다공증(心多孔症)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면서도 딴 생각으로 듣고 말하는 분명하지 못한 방향으로 휘둘러가는 정신 줄을 갖고 엉뚱한 곳에서 꺼낸 희미한 기억을 굳이 맞는다고 고집을 피우다 상대의 속을 뒤집어놓고 꼬리를 내리며 덜덜거리는 낡은 기계의 헛기침이 슬프다 겉으로 멀쩡한 듯해도 야물지 못한 정신을 지니고 사는 심다공증(心多孔症) 환자인 줄 모르니 어떤 운동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면 성능이 나아지려는지 마음을 다독거려 다짐하지만 돌아서면 몸과 따로 놀며 말 안 듣는 말썽꾸러기가 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