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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해설

김을분 시인 시집「아름다운 여백」서평

김을분 시집아름다운 여백서평

 

시인의 사랑과 향기

 

윤 제 철(시인, 평론가)

 

1.들어가는 글

 

  평생 말을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글로써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도 없이 갈고 닦아 윤이 나도록 다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6.25를 겪으면서 평탄치 않은 청춘시절을 가슴에 담고 굳은 의지로 꿈과 희망을 우려내면서 김을분 시인은 생애에 바치는 순에보(殉愛譜)를 담은 한 꾸러미의 시 원고를 들고 오셨다.

  시집을 낸다는 것은 틈틈이 써놓은 시의 편 수 만큼의 층수를 지닌 빌딩을 짓는 것과 같은 가치를 지으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속속들이 담아 갈피갈피 담아놓은 것을 혼자만 지니고 감춰버릴 수는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겐가 보여줘야 한다는 최소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어느 독자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어 어려운 삶의 용기를 주어 닫힌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보관하면서 추억과 꿈을 번갈아가며 보다 윤택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간 흔적으로 남기는 유익한 수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리가 밝고 올곧은 성품을 고스란히 표현욕구의 길과 함께 하신 김을분 시인의 시세계를 먼저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며 조명하고자 한다.

 

2.시인의 사랑과 향기

 

예쁘지도 밉지도 않은

수수한 꽃으로 피어나

고향집 텃밭에서 수줍게 웃었지

 

그리움의 알뿌리

주렁주렁 품고도

부끄러워 얼굴 붉히며

밤바다 꽃잎 같은 눈물만 떨구었지

 

감자밭 휘돌며

휘파람 불던 그 소년

지금 어디서 자주꽃 웃음 기억할까

 

물안개 속에서

내 꿈이 아른거릴 때

소리 없이 웃어주던

자줏빛 첫사랑

-자주 감자꽃전문

 

  자주는 보라보다 붉은 색감을 지녔다. 어려웠던 시절 쌀이나 보리가 떨어지면 솥에 쪄서 밥 대신 먹었지만 요즘은 조리해서 통째로 먹거나 으깨서 먹고, 빵을 만들거나 소스를 걸쭉하게 하기 위해 가루로 갈아서 쓰기도 한다.

 「자주 감자꽃은 휘파람 불던 그 소년을 기억한다. 고향집 텃밭에서 수줍게 자라 부끄러워 얼굴 붉히며 눈물만 떨구었다. 자주꽃 웃음을 기억해주기를 아직도 바라고 있다. 소녀 시절의 꿈과 사랑이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묘사된 시다.

  누구에게 들킬까봐 가슴에 담고 숨죽이던 순수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화자는 자신이 한 말로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자꽃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털어놓고 싶은 것이다. 사랑은 여행을 하듯 이곳저곳 끼웃거리다가 짝을 맺으면 꼭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만개한 벚꽃들이 절정을 노래하는

찬란한 꽃 단지에

 

바람이 한 차례 말려온다

상춘객들의 탄성

 

수많은 꽃잎은

하늘 가득

꽃나비 되어

춤을 춘다

석별의 공연이다

 

서서히 내려와

내 얼굴과 손등에 사정없이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삼백예순날 인내한

아픔과 설레임 두고

나풀나풀

사라진다

-꽃잎은 꽃나비전문

 

  만개는 석별의 공연이다. 석별은 다시 작별로 이어진다. 흔희 절정을 지나 꽃잎이 떨어지면 눈이 내리는 4월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 꽃잎이 공중에 날리며 떨어져 벚나무가 있는 주변을 겨울에 이어 하얗게 눈처럼 덮어준다.

  그러나 화자는 떨어지는 꽃잎 하나하나를 꽃나비로 보고 떨어지는 모습을 춤을 춘다고 노래하면서 얼굴과 손등에 닿는 꽃잎을 입맞춤했다. 한 해 동안 간직하고 떨치지 못했던 아픔과 설레임을 놔두고 홀가분하게 사라져야 한다.

  상춘객의 탄성에 젖어 찬란한 꽃 단지로 만개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벚꽃놀이에 취한 순간은 꽃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다가 땅에 떨어지기 싫었을 것이다. 꽃잎과 꽃나비, 작별로 이어지는 상념의 편린들은 독자의 가슴에 산들산들 날리고 있다.

 

고향집 텃밭에

한 고랑이 다 백합이었다

꽃을 심은 집은 우리뿐

온 동네에 달콤한 향기 내 뿜으며 피었다

 

오르고 내려올 때마다 삐걱이는

마당 대추나무에 매달린 작은 그네

꿈길 맴도는 자장가였다

 

황굴산* 앞까지 단숨에 날아간 듯 황홀했고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다정했다

 

내 생()

가장 아름다운 여백이다

-잊은 듯 살고 싶지만전문 *황굴산 : 마을 지킴이 같은 앞산

 

  텃밭은 집의 울타리 안에 있거나 집 가까이 있는 밭이다. 으레 채소를 심어 식품으로 재배하였지만 백합을 심는다는 생각도 못했다. 그네를 만들어 황굴산까지 나르는 듯 꿈길을 맴돈 고향집 텃밭은 잊은 듯 살고 있지만 언제나 떠올리며 되새김질해왔다.

  얼마나 꽃을 좋아했으면 백합을 심었으랴.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향기 사랑을 온 동네까지 나누어 주었다. 내 키 보다 높은 위치로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많음은 꿈을 바라보는 횟수를 늘리거나 시야를 넓히는 기회가 되었고 황굴산은 화자를 굳건히 지켜주었다.

  텃밭은 화자의 삶의 근간을 이루는 거름이 되었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온다 해도 견뎌낼 수 있는 여백이 되었다. 욕심으로 가득 채우지 않고 비어 있는 부분으로 여지를 남겨 삶의 완급을 조절하는 도구로써 사용할 수 있는 작은 영토를 가꾸고 있다.

 

어머니는

봉숭아꽃 활짝 핀 화단 앞에서

모시적삼 모시치마에

옥색 풀을 드리고

 

종일 웃던 채송화 입을 다물면

세모시 다듬질에 허리가 굽었다

 

모시적삼 앞 섭이

도르르

말리면

 

어머니는

화로에 인두를 꽂고

 

창살무늬가 어스름히 밝아올 때

단잠과 맞바꾼

식구들의 한복을

 

어머니의 보자기에 정성껏 쌌다

-어머니의 보자기전문

 

  보자기는 물건을 싸는 작은 보를 말한다. 어머니는 한복을 정성껏 보자기에 정성껏 싸셨다. 가족이나 자식들을 위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셨다. 화단 앞에서 채송화 입 다물고 나서 앞 섭이 또르르 말리면, 풀을 드려 화로에 인두를 꽂아 다림질하느라 허리가 굽었다.

  화단은 가족이다. 입혀야할 옷에 정성을 다하였다. 쉬지 않고 하루를 쓴 어머니는 옷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잘못될까봐 손질을 다 마치느라 단잠을 다 바친다. 희생을 다하여 남편과 자식을 사랑으로 감싼 보자기다.

  어머니의 보자기는 은유로 표현한 전략의 성공을 의미한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한 편의 시 안에 어머니의 모습을 통한 여러 가지 추억이 살아나 보답을 다하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도 기억해내고 있다.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마음속에 살아계신 어머니를 간직하고 싶다.

 

3,나오는 글

 

  한 편의 시가 짧을지라도 한 편의 소설 속에 담긴 이야기가 간결하게 정제되었다. 시는 함축, 은유, 상징의 요소가 조화롭게 응결된 결정이다. 여러 편의 시가 모여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리듬을 살려 화자의 내면의식의 흐름은 이미지를 통하여 공감할 수 있다.

  요즘 시문학은 생활을 하면서 현장에서 다가오는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느낌을 감각적으로 상상력을 동원한 비유를 통하여 표현욕구의 충족에 불씨를 당겨 묘사하는 것이다.

  김을분 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우리민족의 수난을 번갈아 겪으시며 지나쳐야했던 기다란 징검다리를 건너며 마다하지 않고 참고 견뎌야 했다. 어려운 환경을 적응하면서 몸에 배인 잠재의식으로 깊숙이 자리 잡고 소시민적인 안목으로 있는 그대로 느낌을 솔직하게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내고 있다. 어느 곳에 있어도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원만하게 일상의 난제를 해결해나가는 무르익은 생활향기가 풍겨 나온다.

  시집은 시를 쓴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그릇이다. 일상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물이나 사건에서 시상을 만나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 시를 만드는 재료와 도구로써 풍부한 어휘력과 탁월한 시어를 선택하여 빚어진 시편들은 귀하디귀한 보물로 태어난다. 시집 발간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꾸준한 노력으로 발전된 시의 세계가 독특하게 구축되는 즐거움을 누리시고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시집이 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