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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산첵-수필

충무김밥 아지매

수필

 

충무김밥 아지매

 

김미옥(수필가)

 

 

시장 입구 미용실 옆에 충무김밥간판이 새로 달렸다. 문득 옛 친구를 만났을 때처럼 반가웠다. 내게 충무김밥은 비릿한 바다 냄새와 여객선의 기름 냄새 그리고 충무김밥 아지매들의 억척스런 삶이 함께 떠오르는 추억의 음식이다.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이면 으레 부산으로 갔다. 화덕 앞에서 땀을 흘리며 밥하기도 쇠꼴 베기도, 엄마를 따라 김매러 가기도 싫어 방학이 시작되면 이내 언니네로 달아나곤 했다. 갈 때는 저녁 배를 타지만 돌아올 때는 언제나 아침 배를 탔다. 부산항에서 아홉 시 무렵 출항한 배가 중간지점 충무항에 닿을 때쯤 점심시간이었다.

배가 들어올 시간이면 부두에는 양동이를 인 충무김밥 아줌마들이 전투태세를 갖춘 전사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예닐곱 명의 아줌마가 배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동동거리는 모습은 백 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선 선수들처럼 사뭇 긴장감이 느껴졌다.

배가 부두에 채 닿기도 전에 초를 다투어 건너뛰었다. 마치 거미처럼 조르르 순식간에 위 아래층으로 흩어졌다. 배가 정박하는 잠시 동안, 불꽃 튀는 경쟁은 예정되어 있었다. 부두에서는 동지지만 배에 오르는 순간 숨 막히는 경쟁자였다. 한 사람이 돌고 나가면 이내 다른 사람이 밀고 들어왔다. 때로는 한 사람이 미처 나가기도 전에 급하게 뛰어들어 야릇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김밥을 팔면서도 눈은 서치라이트처럼 계속 사람들을 훑었다. 먹잇감을 찾는 독수리 눈빛이었다.

배가 잠시 정박하는 그 짧은 동안 선실은 아줌마들에 의해 접수되곤 했다. 검은색 일복바지에 흰 저고리, 흰 머릿수건을 쓴 날렵한 일개미 같은 아줌마들. 긴장된 눈빛으로 돌아치는 걸음에서는 바람이 일었다. 그 서슬에 길을 터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반들거리는 까만 김에 싸인 뽀얀 밥, 빨갛게 양념한 오징어꼬치와 적당히 익은 무김치가 하얀 종이 위에 펼쳐지면 선실 가득 퍼지던 냄새. 애써 외면하려 해도 시장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 많은 사람이 사지는 않았다. 옥수수나 빵으로 대충 허기를 때우기 일쑤였다. 늦게 온 아줌마가 하나도 못 팔고 돌아설 때는 뒷모습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정작 나는 사본 적이 없다. 주머니에 용돈이 제법 들어 있었지만 한 번도 아줌마를 불러 보지 못했다. 혼자 먹을 용기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무섭게 돌아치는 아줌마의 번득이는 눈과 마주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손 하나만 살짝 들어도 왈칵 달려왔을 텐데, 속으로 망설이기만 했을 뿐 끝내 손가락 하나도 들어보지 못했다. 대신 뱃전으로 나가 부신 햇볕에 졸고 있는 한낮의 항구와 분주한 갈매기에게 눈을 파는 것으로 허기를 달랬다.

십여 분쯤 될까. 다시 출항 뱃고동이 울리면 아줌마들의 걸음은 더한층 빨라졌다. 발 어디쯤에 바퀴라도 달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곧바로 내려가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저마다 눈에 불을 켜고 쫓기듯 달음박질걸음으로 끝까지 손님을 찾아다녔다. 나처럼 망설이던 사람이었을까.

아지매, 여기요!”

꼭 그 순간에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두 번째 고동이 길게 울렸다. 김밥 아지매들 어서 내리라는 경고 같았다. 곧바로 엔진소리와 함께 무지갯빛 기름띠 물이 소용돌이치고 배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기웃거리며 종종걸음 치는 아줌마. 미처 내리지 못하면 어쩌나. 그러다 물에 빠지지는 않을까. 지켜보는 내가 도리어 애가 탔다. 배가 부두와 몇 걸음 떨어지고 나서야 아쉬운 시선을 거두고 이미 벌어진 간격을 훌쩍 건너뛰었다. 속으로 조바심치던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바다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척박한 섬인 고향에서도 보지 못한 억척스런 충무 아줌마들이 매번 충격을 주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어디서든 충무김밥을 만날 때면 늘 그 아줌마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밥 먹을 시간조차 없는 어부들에게 간편하게 먹으라고 싸 보낸 김밥이 쉬 쉬어버려 반찬을 따로 싸기 시작했다는 충무김밥. 어부의 삶이 배어 있는 충무김밥의 유래다. 그러나 매콤하고 쫄깃한 오징어무침과 시원한 무김치의 조화로 지방에 관계없이 사랑받는 음식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나는 한동안 충무김밥을 잊고 있었다.

조만간 동네 김밥집에 가봐야겠다. 하얀 종이에 포장해주는 충무김밥을 펼쳐놓고 다시 추억에 젖어보고 싶다. 양동이를 이고 하늘다람쥐처럼 날아다니던 억척 아지매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도 충무항에 가면 그 김밥장수 아지매들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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