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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탐방

김수영 문학관을 찾아서

김수영 문학관을 찾아서



 


1.들어가는 글

 

  2017519일 금요일 오전 11304호선 쌍문역 2번 출구 안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다. 성동구민대학 시창작반 회원님들과 함께 방학동 김수영문학관을 관람하기로 하였다. 시간이 되었을 때 강기영, 김정희, 민병기, 송방자, 이경호, 이명희, 정통원, 최인남, 허성열 회원님께서 오셨고 권항기, 유병란, 강선호, 윤효숙 회원님은 부득이 참석을 못하셨다.

  쌍문역 인근에서 식사를 하고 갈 예장이었으나 식당을 미리 정해놓지 않은 상황에서 문학관으로 가서 찾아보기로 하고 쌍문역 버스정류장에서 도봉 06 버스를 탔다. 정류장 이름이 김수영문학관으로 되어 있어 편리했다. 버스에서 내려 걷는 길이 김수영길이었다. 바로 문학관이 보였고 쉽게원주추어탕집을 찾았다.







  김춰놓은 보물이라도 찾은 듯 발길을 자연스레 들여놓고 보니 안성맞춤이라 아늑하고 우리를 반겨주었다. 최인남 회장님께서 점심식사를 내셨다. 양도 좋고 맛깔스러운 명품식당이었다. 격을 맞추어 회장님께서 잘 봐두셨다는 커피전문점에 들렀다. 과연 일품이었다. 필자는 차 한 잔 마시고 바로 일어나 문학관으로 갈 요량이었지만 공부하기에 좋은 공간은 더 이상 없어 간단히 준비한 자료를 회원님들께 나누어 드리고김수영 시인이란 주제로 차를 마시면서 진행하였다.

 

2.김수영 시인

 

  김수영 시인(1921-1968)은 본관은 김해(金海). 서울 출생. 지주였던 아버지 김태욱(金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다. 1943년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교원생활과 연극운동을 하였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년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하였다.

  북한의 남침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그는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뒤 미군통역생활도 하고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하였으나, 1956년 이후부터는 시작과 번역에만 전념하다가 1968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활동은 1945년 문예지예술부락(藝術部落)에 시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적 방황과 번민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시화하였다. 1959년에 간행된달나라의 장난은 이 시기의 시적 성과를 수록한 첫 개인시집이다. 1950년대의 지적 번민 속에서 성숙해온 그가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60년의 4월의거이다. 여기서 그는 평등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를 위한 혁명에서 시적 열정을 얻는다.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는 그로 하여금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구실을 담당하게 했다.

  그는 현실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 일어서고자 하였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며 현실참여의 생경하지 않은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대표 시 중에 하나인을 알아보기로 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의전문

 

  이 시는 '''바람'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이미지의 반복과 갈등을 통해 구성된다. ''은 여리고 상처받기 쉽지만 동시에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죽지않는 강인한 생명력 곧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바람'은 풀을 시련에 들게 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풀을 괴롭힌다는 의미에서 강한 부정성을 드러내지만 이를 통해 풀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3,김수영문학관

 








 

  문학관 앞에서 일행은 기념사진을 전문 사진작가이신 정통원 회원님의 수고로 훌륭한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포즈도 배우면서 즐거움을 만끽하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문학관에 들어섰다.

  도봉구청에서 설립하여 관리하고 있는 문학관은 전시실이 1,2층에 있었고 작은 도서관(아동열람실)3, 대강당(각종 세미나, 시낭송회, 등 대관 신청 시 무료 제공(음향시설, 책상 및 의자 등 구비)4, 그리고 5층 옥상에는 (옥외쉼터 및 휴게 공간)가 마련된 건물 한 동 규모로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1전시실에는 시와 평론 중심으로 전시자료와 영상, 시작(詩作), 낭독 녹음실, 감상메모, 그리고 수장고와 사무실이 있고, 2전시실에는 산문 및 일상유물 중심으로 전시자료와 김수영 서재, 독서대, 영상, 검색대가 설치되었다.

 

  나의 시에 대한 사유(思惟)는 아직도 그것을 공개할 만한 명확한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나의 모호성은 시작(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세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족탑을 생각해 볼 때, 시의 탐침(探針)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고,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의 건축의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시작상(詩作上)으로는 그러한 명석(明晳)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 김수영의시여, 침을 뱉어라중에서

 

  폭탄과 교훈과 시사를 한국시단에 던지던 김수영은 너무도 아깝게 너무도 일찍 가고 말았다. 그는 과거에 만족하는 시인이 아니었다. 언제나 앞을 내다보고 오늘의 정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기만족을 모르는 시인이었다. 보수주의자들 에게는 무모한 시인이라 불리었고, 안일을 일삼는 사람에게는 자못 전투적이라는 지적을 받았고, 소심한 사람들로부터는 심지어 위험하다고까지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소신대로 오늘의 한국시에 문제를 던지고 그것들의 해결을 위하여 가장 과감한 시적 행동을 보여주던 투명하고 정직한 시인이었다

- 김현승 시인의투명하고 정직한 시인 김수영

 

 김수영은 자유를 시의 기본적인 조건인 동시에 궁극적인 조건인 동시에 궁극적 이상으로 설정하고 그 최대치를 시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그에게는 진정한 시였다. 그에게 시적 자유는 기존 문학에 대한 위협이 되는 동시에 기존 사회 질서에 위협으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시란 꿈을 추구하는 것이며 여태껏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에 의하면 그 자유는 고독한 것이며 장엄한 것이다.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를 제목으로 한 어느 신문 기사

 

4.연산군 묘

 


 

 김수영 문학관을 나오면서 가까이에 있는 연산군 묘를 들러 가기로 했다. 연산군 내외와 태종의 후궁, 그리고 딸 내외의 묘가 위에서 아래로 놓여 있는 곳이다. 역사 속의 폭군으로 각인되어 있는 인물로 오랜 시간을 비난받아왔다.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 태어난 연산군은 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렸다지만 어머니의 억울함을 밝히겠다는 의도에서 두 번씩이나 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문란하게 하자 중종을 추대한 반정으로 강화에 유배되어 그해 31세로 세상을 떴다. 그 후 재고의 여지가 없이 폭군의 표상으로 남아 임금의 명예를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5.은행나무(보호수 수령 550)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33호로 지정되었다. 나무 높이는 25미터, 둘레는 10.7미터, 1968년 나무 형태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서울시 보호수 제 1호로 지정하였다. 2013년에는 문화제적 가치 등급을 상향 조정하여 기존의 보호수 지정을 해지하고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당시 조사 결과 나무 나이는 약 550살로 추정되었다.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긴 나무로 여러 일화가 전하고 있다. 경복궁 중측 당시 징목 대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흥선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대감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금도 방학동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나무로 1990년대 말 이후 매년 정월대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6.나오는 글

 

  한국문학의 대표적 자유시인인 김수영 시인이 생전에 시작(詩作) 생활을 하였던 도봉구에는 그의 본가와 묘, 시비가 있다. 그리고 600년 동안 마르지 않고 흐르는 원당샘 공원, 연산군과 정의공주 묘, 그리고 도봉산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둘레길과 더불어 자연과 문학이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을 제공하고자 도봉구에서 김수영문학관을 건립하여 20131127일에 개관하였다,

  강의실에서 보내던 시간을 벗어나 푸른 5월을 만나 신선함과 편안함을 동시에 맛본 하루였다. 먼저 시문학 창작의 길을 걸었던 선배시인의 활동을 찾아보고 시도했던 방법이나 남긴 흔적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의 창작세계를 여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후배들의 임무 일 것이다.

  창작을 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에 못했던 일을 한다는 구실로 과거의 추억에 안주하는 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미래를 여는 역할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한국문학사적 흐름에 편승하면서 지극히 일부라 하더라도 무언가 족적을 남길 수 있겠다는 꿈을 가져봄도 오늘의 김수영문학관 관람의 의의가 아닐까 여겨볼만 하다


2017년 5월 19일 늦은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