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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여행기

북유럽 8개국 (2012.7.28)

7월 28일



북유럽의 베네차아라고 불리는 곳이 160만의 인구를 가진 수도인 스톡홀룸이었다. 맬라른 호수는 식수가 가능할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10대 아름다운 수도에 뽑힐 정도로 예쁜 도시였다. 왕의 섬 속에 파티장소로 쓸 수 있는 시청사가 법원, 도청, 시경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노벨은 스웨덴의 화약개발을 한 사람으로서 세계적으로 6개 분야에 공헌을 남긴 사람들에게 시상하라는 유언에 의해 800만 달러의 유산으로 해마다 주는 상으로 1901년 12월부터 컨설트하우스에서 사망한 날을 기념하여 시상을 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처음에는 스웨덴 사람들이 자국을 위해 일한 사람에 상을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갖기도 했다. 평화상만 유언에 의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상식을 하고 시청사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고전인 로코코 건축양식과 현대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도시였다.

 

스웨덴에서는 구교와 신교가 간월적으로 전쟁을 하였는데 30년 전쟁으로 절대강자로 부상하여 패하지 않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스톡홀룸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크고 활기 있고 우리정서에 맞는 도시라 할 수 있다. 호수 주변의 배는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섬에 시청사가 있다. 이 도시는 통나무가 혼자 떠있던 곳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자손들에게 잘 되라는 염원을 담아 목마를 선물로 주는 풍습을 지니고 살아왔다. 아직도 전깃불 보다 촛불을 많이 사용하는 습관으로 크리스탈 아트 유리공예가 발달된 동기가 되었다. 또한 여성들은 화장품 보다는 장신구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칼구스타프 16세 왕궁은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 바로크, 로코코 양식이었다. 정원이 없었으며 집무실, 영빈관, 박물관 들 왕이 출타 시에 공개하도록 되어있었다. 그후 왕자, 공주를 위해 밖으로 이전하였다.

 

남섬에는 부모가 돌봐 주지 않는 18세 이상 독립한 젊은이나 노인 독신자들을 위한 임대 아파트가 80%이상이나 되었고 노무자들의 빈민촌으로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문인들이나 예술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잡상인들은 없고 노천에 과일 정도를 파는 시장이 있을 뿐이었다.

 

버사 전함박물관에는 전함으로 사용하려던 배가 전쟁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고로 인하여 2만 여명이 수몰되었던 유물들을 인양해 보관하고 있었다. 구스타프 버사 국왕이 당시로서는 가장 큰 배로 만들었지만 밑바닥에 깔아놓았던 자갈이 채워지지 않아 한편으로 쏠리면서 기울어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하여 멀리가지 못하고 가라앉고 말았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조선기술이나 선원들의 생활모습 등을 알 수 있어 역사적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외관의 화려함은 오늘날의 배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화려하였다. 필자의 디카로는 어두운 박물관 안에서의 내용물들을 찍을 수가 없어 유감이었다.

 

아무리 잘 잘아도 문화가 없으면 힘이 없고 못살아도 문화가 있으면 힘을 느낀다. 루블박물관에서 한국어로 안내하는 것은 문화비 투자에 달려있고, 실비아성당에서 천장의 그름을 털어주고 일본어로 안내 방송된 예가 있다. 전쟁 폭격시 소중한 문화재가 돌로 만들어진 문화는 오래 보존 되었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는 쉽게 소실되고 말았다. 먹고 살만한 가운데 문화가 살아난다고 볼 수 있다.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서민들의 애환을 나타낸 것으로 음악의 수준을 느끼게 하고 국악, 대중가요는 민족의 한을 표현한 것인데 수준 아래로 여기는 것은 나븐 경향이다. 일본은 명치유신 때 영국영향을 받아 영국인처럼 문화를 형성하여 유럽에 그 문화를 전달하였다. 그후 재벌 부인의 희망은 미술관 관광,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다음 일정인 핀란드로 가는 크루즈선 실라라인을 승선하기 위해 스톡홀롬 항으로 이동하였다. 베에 올라 짐을 푸는 사이에 배는 어느새 출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작은 방에 이층으로 된 침대를 사용해야했다. 필자는 이층에 올라가서 안전도를 점검하고 내려왔다. 7층에는 레스토랑이나 클럽, 바, 쇼핑코너, 카지노, 사우나, 미용실, 어린이놀이 공간까지 설비되어 있는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저녁식사를 뷔페로 일행들이 모여 앉았다. 마침 인솔자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빌늬우스나 트라카이성을 보지 않고 십자가의 언덕을 보는 것에 대한 일행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서 여행사에서 아무런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인솔자선에서 해결되기를 바라다는 의견을 제사해주었다. 이제 그곳에 갈려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는 길에 비슷한 곳이라도 한 곳을 찾아 머물러주기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7층에 들러 올라선 12층은 갑판이었다. 오후 9시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훤한 낮과 같았고 그때서야 해가 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멋진 일몰을 구경하고 들어가자는 일행 분들의 성화를 못 이겨 함께 하였는데 유럽의 어느 곳에서는 일몰을 돈을 내고 보았다면서 돈을 벌었다며 환호하고 있었다. 정말 다른 곳에서 본 일몰 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마음을 부편하게 했던 일정 변경에 대한 것이 일단 마무리되었다고 보고 편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