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이야기
윤제철
2010년 2월말에 1박2일로 홍천 김정헌 시인님 댁에서 있었던「세계문인협회」새봄맞이 행사에 30여분의 문인들이 참석했었다. 함께 참석한 필자는 김 시인님과 잠깐 마주 했는데 5월에는 봄나물이 한창이라 비비면 밥맛이 제철이니 한 번 놀러 오라는 말을 하였다.
약속을 하고 돌아와 여러 가지 일에 밀쳐 5월을 넘기고 말았다. 월간「문학세계」사무실에 들렀을 때 전화가 왔으니 연락을 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전화번호를 받아들고 전화를 하려하니 그냥 한 말이려니 생각이 들어 못하고 말았다.
시간만 보내다가「문학세계, 시세계 동인지」출판기념행사장에서 마주한 김 시인님을 보기가 쑥스러웠다. 그러나 구김살 없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진심어린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더위가 가기 전에 오면 참외니 토마토 먹을 게 많으니 놀러 오라는 말을 거듭하는 갓이었다. 미안하기 작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상의를 한 결과 8월 중순 쯤 일요일에 가기로 했다. 평일 날들은 연수니 뭐니 밖에 행사가 많아 틈이 없었다. 당일 날 딸아이를 데려올까 했지만 피곤하다며 늘쩡거려 부부만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고속도로가 빠를 것 같아 춘천고속도로로 가서 중앙고속도로 들어가 횡성 나들목에서 나와 동면 방향으로 들어가 금계로를 쭉 달려 자운2리 김 시인의 2층집을 찾아갔다. 먼저 한 번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기억이 없어 김 시인의 도움을 받아야했다.
부인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는 김 시인이 고맙기만 했다. 찬 물을 한 잔 마시고나서 뽕잎 차를 마셨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밭으로 내려가서 물이 흐르는 계곡을 보았다. 노란 참외를 따서 찬물에 씻어서 나와 아내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싱싱하고 달아 속이 시원하였다. 다시 집 옆에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언제 잡았는지 닭을 꺼내놓고 막걸리를 권하였다. 승용차를 가져갔으니 한 잔만 한다고 하면서 조금씩 마셔야했다. 부부가 겪은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안 해본 일이 없는 그는 실패를 해도 결코 실망하거나 비관하지 않았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쉽게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구나 싶었다. 그리고 닭죽을 맛있게 쑤어 배를 흡족하게 하였다.
치매가 있으신 노모를 모시고 사는 그는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곁에 계시는 모습이 좋기만 하였다. 동기간이 다녀가는 것도 즐겁고 반가운 것이다. 치매 증상이 항상 그런 것이 아니어서 한 편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따로 사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슬하에 두고 있는 김 시인도 예순이 넘은 나이에 대학교 공부를 하고 있다니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식후에 다시 차 한 잔을 하고 노래방 기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전문 노래방 이상의 규모로 설치되어 있었다. 두 내외는 같이 어우러져 노래를 예약하여 불렀다. 노모께서도 같이 앉으셔서 박수를 쳐주셨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고 있었다. 마이크 성능도 좋아 아무런 잡음이 없이 깨끗하게 귀에 들렸다.
점심만 먹고 나오려고 했던 일이 벌써 시간이 많이 갔다. 김 시인은 뒷산 넘어 계곡에 물이 많이 불어 한창 좋을 것이라며 물가에서 놀다가라고 서둘렀다. 옷이 불편하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며 건네주었다. 산길을 거뜬히 잘 달리는 차량이 힘이 좋았다. 숲속으로 난 길을 달렸다. 마치 그는 서부의 개척자 같이 신이 나서 차를 몰았다. 정상을 넘어 뒤편에 계곡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계곡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차를 세우고 계곡으로 내려가 발을 걷고 물에 발을 담았다. 차가운 물이 시릴 정도였다. 주위의 소리는 모두 잠재우고 계곡 물소리만 들렸다. 포도와 참외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조금씩 마셨다. 차를 운전하여 서울로 올라 가야하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하루 밤을 자고 가야 술도 마시고 마음 놓고 놀다 갈 수 있다고 당부하였다.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말을 나눴다. 나는 나의 시론인 자연과의 대화를 통하여 시상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고 그는 자신을 버리고 무아지경에 빠져 시를 건진다고 했다. 나는 물과 바위가 계곡에서 나누는 대화를 귀를 기우려 듣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움직일 수 없는 바위의 성격을 폭우로 인하여 불어난 계곡을 그려내고 있었다. 물과 바위라는 자연을 대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는 자신의 섭리를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서 싸우지 않고 서로 타협하려한다. 서로 소리를 질러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본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계곡의 힘찬 흐름을 눈에 그리며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너무 뜨겁게 달궈진 대지를 나무라듯
간밤에 내린 폭우는 계곡을 채웠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물줄기와
자리를 지키느라 움직일 수없는 바위는
서로 힘을 겨루다 못해
바위를 타고 넘어가야 하는 물줄기는
아래에서 위로 치솟아 본분을 어기며 탄식을 한다.
엄청난 힘으로 밀어보지만
꿈적도 하지 않는 바위도 힘이 부친다.
바위야 비켜다오, 물아 조금씩 내려와다오
서로는 쉴 새 없이 사정을 하며
계곡을 요란하게 지키고 있었다.
- 윤제철의「계곡풍경」전문
산림 보호를 위해 차단했다는 도로는 오래된 원시림처럼 느껴졌다.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서쪽 햇살을 받으며 서있는 숲 속 가로수는 마구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빛발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침마다 산 정상을 2시간 걸려 산책하고 내려온다는 부부의 모습을 상상하며 오길 잘했다는 보람을 갖고 내려왔다.
내려오다 집을 지어 건강관리를 하려고 들어오셨다는 어느 교수님 부부모습과 주민들과 어울리는 그를 보고 부러워해야했다. 배도 고픈 것을 느끼지 못한 채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야 한다며 새로 차린 밥상을 받았다. 물맛이 좋아서인지 소화도 잘되고 몸이 편하였다. 집이 놓여있는 자리가 앞으로 여러 산의 능선이 굽이굽이 바라다 보이고 뒷산은 품은 듯 안아주는 형상을 한 곳이라 좌청룡우백호 명당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차 뒷자리에 감자며 옥수수, 오이를 담아 한 박스 실어주며 가을에 꼭 다시 한 번 더 놀러 오라고 인사말로 대신하였다. 노모께서도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발길을 돌렸다. 어두워져 가는 저녁 길을 달려야했다. 오던 길을 역으로 돌려서 갔다. 중앙고속도로는 정상으로 달렸으나 춘천고속도로는 정체의 연속이었다. 늦으면 늦는 대로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자신만만해하던 그의 모습에서 여유를 배우기로 했기 때문이다. 길이 막혔는데 빨리 가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나 엉뚱한 발상이 아닐까? 생각만 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김 시인께서 여러 가지 깨우쳐 준 것들을 잊지 않기로 했다. 가을이 오면 어느 하루를 잘 잡아 딸아이를 데리고 가리라 다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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